9시 30분, 드립커피
계절이 넘어갈 때 카페는 조금 바빠진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마음이 바빠진다. 동네의 작은 카페인 이곳에서는 철마다 바뀌는 계절메뉴가 중요하다. 단골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친숙 하면서도 신선한 메뉴들을 개발해내야 한다. 하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요즘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라 부쩍 드립커피와 따뜻한 라테 주문이 늘었다. 여름에 비해 디저트도 조금씩 더 잘 팔리고 있다.
나는 매년 가을을 탄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이 마음의 문을 툭툭 친다. 이제 어서 그 속에 어둡고 서늘한 것들을 꺼내보라고.
마음은 바쁘지만 기운은 나지 않는 그런 날들이 이어졌고 평소처럼 단골손님이 방문했다. 나는 항상 주문하던 아이스 라테를 준비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다른 거 시킬게요. 음, 향긋한 커피가 먹고 싶은데…” 손님이 말문을 열었다.
이럴 땐 추천을 잘해야 하는데 고민이 됐다. 평소에 아이스라테를 즐겨드시던 손님이니 신맛보다는 고소한 맛을 선호할 거고, 거기에 향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면 우리 카페 블렌드 원두가 딱일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브라질, 그리고 에티오피아가 적절히 섞여 다크초콜릿과 견과류가 연상되는 고소한 풍미가 좋은 커피다. 향을 더 잘 느끼려면 아메리카노보다는 드립으로 따뜻하게 가 좋겠다.
“그럼 블렌드 원두로 내린 드립 커피 드셔보세요. 고소한데 향도 잘 느껴지실 거예요.”
“네, 그걸로 주세요.”
보다 신중하게 커피를 담고 갈아낸다. 평소보다 더 굵게 갈아낸다. 쓴 맛이 강해지지 않게. 물도 평소보다 덜 뜨겁게 준비한다. 가루가 된 원두에 정성 들여 물을 붓고 기다린다. 물을 먹은 가루가 몸을 부풀리고 카페 안에 향이 퍼져나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뜨거운 물을 한껏 받아들인 커피가루가 ‘나 이제 준비됐어.’ 하고 여유롭게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여유롭게 향기와 맛, 색으로 주변을 바꿔가는 점 때문에 나는 커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짙게 물든 낙엽처럼 갈색빛이 도는 커피가 방울방울 드리퍼에서 떨어진다. 우려 져 나오는 커피의 색이 점점 연해지면 드리퍼를 제거한다. 다 내려진 커피에 약간의 물을 넣어 섞어준 뒤 작은 잔에 담아 살짝 맛을 본다. 이 한 모금에 가을이 푹 담겨있다. 분명 손님도 좋아할 것이다. 손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받아 들고 나선다. 나도 올 가을만큼은 이렇게 새로운 커피를 건네받듯 이 계절을 가볍게 받아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