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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서 Sep 29. 2024

무지의 송곳날

  가끔 나의 공황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때가 있다. 공황은 누구라도 흠칫하며 "어서 푹 쉬어."라고 말하게 하는 마법의 단어라서, 이 활용법은 지금까지 아주 수월하게 통과되었다.


  이를테면 옛정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친구와 관성 같은 만남을 가져야 할 때. 일단 친구에게 먼저 간을 본다.

  "언제 한번 만나야 되는데... 내가 요즘 계속 몸이 안 좋아서 병원 다니느라 정신이 없네 ㅠㅠ..."

  그러면 대부분은 요즘도 몸이 많이 안 좋냐 묻고, 그러다 보면 "몸 좋아지면 보자~"하고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족행사 때도 마찬가지다. 몸이 안 좋다고 말하면 보통은 채근보다 걱정을 하는 것이 당연하기에, 혼자 슬그머니 빠져나와 집에 있기도 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휴학까지 단숨에 통과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해도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생긴다. 지인들은 서운해하지 말 것.)


  실제로 공황을 치료 중인 것도 사실이나, 거절 못하는 나의 성격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말이 있으니 병이 있다는 이야기도 쉽게 꺼낼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본질과는 조금 멀리 있을 수 있으나 어쨌든 공황을 겪는 5년 넘게 나는 병 때문에 슬픈 적은 있어도 부끄럽거나 숨고 싶은 적은 없었다. 있는 걸 달리 뭐라고 돌려 얘기하나. 그게 더 숨는 것 같아 두렵다.


  그런데 최근, 공황장애 n년차 이래 처음으로 내 병을 부정하고 싶게까지 한 일을 만났다. 나의 공황과 주변 다른 이들의 공황까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 요즘 마음이 아픈 청년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울증 공황장애로 고통받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속이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겉모습에 치중하고 집착해서예요.


  순간 지금 내가 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게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인지 한참을 벙쪘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보다 나의 어려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말이었음을 알았다. 다른 주제로 이야기가 한참 흘러갔는데도 내가 들은 것은 거기에 멈춰있었다. 공황으로 그동안 힘들긴 했어도 부끄럽거나 창피해서 숨고 싶단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심각한 모멸감이었다. 게다가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그런 소리를 여과 없이 들어야 했다.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비추며 "그게 바로 저 청년입니다!"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눈물콧물로 범벅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그 비참한 심정 때문이었는지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람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종종 저기 뒤에 앉아있는 오빠에게도, 대각선에 서있는 친구에게도 공황 때문에 조금 쉬어야겠다, 오늘은 모임 참여가 어려울 것 같다 말하곤 했었다. 실수를 추후에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가는 당신에게도 공황장애의 고통을 꺼내며 울었었다. 어째서 공황과 우울증이 겉모습에 치중하는 인간의 대표가 되었는가. 속이 상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고 화가 나서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상황을 설명하는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어 속으로 '뭣같다'는 생각만 반복하며 나는 그의 말을 내 안의 소음으로 묻었다.


  그는 그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 같았다. 대개 조심스러운 주제라면 앞뒤에 '일반적이라는 것은 아니다'정도는 첨언했을 텐데, 그런 건 일언반구도 없었다. 나는 그의 말이 차마 고의였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지(无知)가 가장 큰 무기가 된다. 환자에게 '네가 아픈 건 네 멘탈이 약해서야.'라고 말하는 꼴이라니. 눈에 잘 보이는 질환이 아니라고 너무도 쉽게 치부되어 버리는 나의 병. 악의를 갖고 뱉은 열 마디보다 악의 없이 흘러나온 한 마디가 가장 두껍고 날카로운 송곳이 되었다.


  잘 모르면 말이나 말랬다고, 내 병을 말하는 것에 더 조심스러워진 건 그때부터다. 속병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가 더 올라갈 때까지, 나는 그런 무지의 말로부터 노출되기 너무 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프다는 말을 덜 써야겠다. 덜 써야 하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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