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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서 Oct 25. 2024

손때 묻은 시간

  내가 살던 주공아파트 쓰레기장에는 못 쓰게 된 가구들이 많이 있었다. 엄마는 게 중 손볼 수 있을 것 같은 옷장이나 서랍장, 탁자 같은 것을 5층 계단 끝 우리 집까지 낑낑대며 들고 왔다. 그러고선 바닥에 신문지를 겹쳐 깔고 이마트에서 사 온 페인트 뚜껑을 열어 하얀색으로 덧칠을 했다. 마르기를 기다리고 나면 그 위에 광이 나는 니스를 칠하고, 먼지가 타지 않도록 조각천을 만들어 윗면에 깔아주면, 누렇게 바랜 오래된 가구도 금방 새로 산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엄마는 쓰레기장에서 화장대도 가져오고, 책장도 가져오고, 작은 나무상자도 가져와서 하나둘 색을 입혔다. 나는 옆에서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엄마가 “너도 칠해볼래?”하면 냉큼 페인트 붓을 잡고 나뭇결을 따라 색을 칠했다.


  나중에는 재미가 들렸는지, 집이 꽉 차서 더 이상 다른 가구를 들여올 수가 없게 되자 기존에 있던 물건에도 죄다 페인트 칠을 하기 시작했다. 북카트는 보라색, 수납함은 진한 녹색, 음식 트레이는 흰색 바탕에 손수 빨강머리 앤까지 그려서 말려두었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 엄마는 늘 거실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칠하고, 그리고, 말리고 있었다. 그 시절 엄마의 팔에는 늘 페인트가 묻어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흰색으로 칠해진 서랍장이었다. 드르륵, 하고 서랍을 열면 가지런히 접힌 옷들이 있었는데, 깨끔발을 하고 그것을 구경하곤 했다. 가끔 그 사이에 아끼는 인형을 끼워두기도 했다. 자기 방은 치우지도 않으면서 열을 맞춘 옷을 바라보는 것은 좋아했다. 마음도 함께 정갈해지는 것 같았다. 그 서랍장 앞에 가면 은은한 고무향이 났다.


  2단지에서 시작해 5단지, 7단지로 옮겨오며 나는 1살에서 11살이 되었다. 10년의 세월을 함께 자란 주공아파트는 재건축으로 철거되었고, 우리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옆 동네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 버릴 물건들을 쓰레기장에 내놓았다.

  대가리가 큰 구형 텔레비전부터 엄마가 만든 옷장과 수납함 등이 차례대로 버려졌다. 그중에는 내가 좋아하던 서랍장도 있었다. 엄마는 새 가구로 채워질 새로운 집을 내심 기대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손수 칠을 해가며 새것 같아 보이는 물건으로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 새 아파트로 이사 가는 날, 나는 집을 떠나는 차 창문을 열어 쓰레기장에 덩그러니 놓인 가구들이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새로운 집에 이사 오면서 고급스럽고 예쁜 가구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모서리가 뭉쳐버린 니스도, 살짝 벗겨진 칠도 없는, 다른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완전한 새것. 그런 가구들에는 은은한 나무향이 났다. 오래된 고무샘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나는 그 향이 좋으면서도 왠지 어색해서 한동안 나무 냄새가 가장 덜 나는 거실에서 잠을 잤다. 깜깜한 밤, 주공아파트에서 살아남은 물건들 사이에서 눈을 붙이면 나는 원래 살던 그곳으로 돌아갔다. 꿈에는 다 날아가고 없는 페인트와 니스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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