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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o Dec 31. 2020

작자미상 01- 한 여름 밤의 효종갱

한 여름 밤,반딧불이 부는 밤 개똥이는


그 시절 북적북적한 장터 곳곳, 마을 어귀 어디쯤 자리 하나 펴고서 벌어지는 이야기 한마당.


 너나 할 것 없이 지나가던 길을 멈추고 숨죽여 귀 기울인다. 때로는 남의 일기를 엿보듯, 때때로 한울님이 되어 온갖 삶을 훔쳐보다 어느새 이야기 끝에 가 닿는다. 그렇게 이야기는 모두 끝이 나고, 장터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남아 넋 놓고  있던 이도령은, 또 저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래, 삶이란 이토록 자유로운 동시에 명백한 한계에 갇혀 있으니 그것이 무슨 일이든 쉽게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했다. 사방이 막혀 자신이 가진 세계가 스스로 파 놓은 함정에 빠져 더는 벗어날 수 없던 때, 시간은 기어이 선택할 겨를도 없이 좁디좁은 샛길로만 길을 낸다. 그 외의 세계로 가는 길이란 애초에 허무한 잠꼬대일 뿐.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언제고 잠결에 꾼 꿈과도 같은 이야기에 눈을 빛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란 게, 그걸 듣는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항시 어디서든 잡생각이 많아서, 어디서든  곧장 온갖 이야기에 심취하는 이 도령은 여름 피서 겸 산성 주변 초당에서 동문수학하던 학우들을 만난다. 뿌연 술잔과 다식이 오가고 달이 중천에 뜨자 애꿎은 개똥이는 도성길을 되짚어 해장국을 구하러 지게를 지고 먼 길을 떠나고, 남은 들은 한참 주변에 악을 쓰며 우는 매미보다도 더 시끄럽게 이 마을 저 마을 이야기, 이 책 저 책, 내 생각 네 생각. 온갖 상념과 잡담들이 한데 얽혀서 한밤의 별처럼 쏟아진다. 그러다 이야기가 계속 돌고 돌다 보면, 과연 그 유명한 이야기의 저자가 바로 우리 동네 어염집 여인이었다 카더라까지 흘러 들어간다.


 아니. 그렇다면 그간 서책 방에 나돈 이야기들 중 상당수가 그 여인의 재주라고? 세상에 마상에나, 비록 언문일지라도 비범한 재능이라고 웅성거렸다.


“그 봉사의 여식 말이야. 그 이가 바로 그 청이 인가?”
 
그렇다니까! 본인이 밝힌 건 아니지만은.
그 시집 잘 갔다 소문난 몰락 양반네 여식 말일세.”
 
“글쎄 말이야, 아비가 땡중에게 속아 사버린 산삼 때문에 상인에게 팔려 갔다지 않아?
그 팔려 간 배가 하필 폭우를 만나 뒤집힌 거고”
 
“아니, 근데 어찌 물에서 나온 거라던가?.
무슨 그이가 탐라의 해녀도 아니고 말이지.”
 
“뭐 근해에 살쾡이가 뭍으로 끌고 나와 줬더라고.”
 
“에이, 그 말을 믿나 자네는? 순진하긴.
아무리 그 짐승이 총명하기로서니.”
 
 그렇게 하더라는 이야기가 저 스스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이내 엉뚱한 화두로 치고 들어오는 이가 있다. 처음부터 저 홀로 이야기 속 무능한 심봉사에게 그만. 억한 심정이 가 닿는 모양이다.
 
“그거 말이야. 애초에 그 하나뿐인 딸에게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고 주책을 부렸으니!

 그이도 애초에 양반은 못되지 않나? 아주 그냥 눈을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별 관계없이 깜깜한 자일 거야!

 

그래! 말이 양반이지, 체통도 없이 여색에 빠져 아예  제 자식을 버려둔 셈이지. 동네 아낙들도 그런 자는 우습게 봤겠지. 그것도 쓴 이가 나름 아비라, 어느 정도 양념을 쳐 준 것이겠지.

 

그저 불쌍한 맹인만이 실체는 아닐 거야?

 실은 어쩌다 진득하게 관직에 나갔어도 유부녀 희롱 죄로 유배나 갈 위인인데……….”
 
“훠이훠이, 숨 좀 돌리고 말하게.

  누가 보면 자네 이야기인 줄 알겠어.”
 
“흥, 나라면 말일세 그런 부친에겐 효를 다하지   않아. 효 또한 분별이 있어야.”


“그래, 그도 그렇지.

자식도 자식다워야지만, 부모도 응당 부모다워야지.  청이는 애초에 그런 아비를 순순히 섬기는 건 또 무언가? 진정 바른 여식이라면 아비의 치부를 감싸 안으면서도 바로잡으려 해야지 않은가. 그리 똑똑한 아이라면서.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 어떻게 아비를 거스르는가? 천륜이란 것이 있지.”
 
가만가만 듣고만 있던 한 사람이 처음으로 입을 연다.
 
“ 네 가만 듣자 하니, 다 별 소용없는 말들을 하고 있구먼.”
 
“그럼 자네는 어쩔 건가?.”
 
“아무렴 어떤가. 그 양반이 점잖든 아니든 애처로운 자인 게지. 밖에서 봐서야 감 놔라 배 놔라 말만 쉽지. 그리 지어미를 잃고 졸지에 홀아비로 남았는데, 그런 이의 심정을 어찌 알겠나….”
 
그야 그렇다. 남의 사정을 왈가불가해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곳에서 누구에게든 처음부터 모두는 저 스스로 오래된 결말을 가지고 있다. 그이가 부유하든 아니든, 선택할 수 있는 일이랄 게 실상 별로 없으니, 모든 것들은 이미 주어져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 주위 이웃들, 산천의 꽃과 나무의 이름들, 숨 쉬는 공기와 잡담하는 동안 쓰는 말, 그 수많은 사소함이  아이의 많은 것들을 정의하고 결정했다. 때때로 저항하기도 하지만 그 싸움은 이윽고 애처롭다.

 결국, 다 지나고 나서 기억하지도 못할 사연만이 남는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짜인 극본처럼 일상에 수놓아져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아비란 자는 차라리 밖에라도 나돌며 기생집이라도 돌아다니면 좋을 텐데, 산송장처럼 방 어귀에 박혀 나오질 않고 죽지 못해 살아갔다.     어느새 문지방 안으로 들어서기만 해도 느껴지는 짙은 음울함이 항시 아이의 땋은 머리 끝으로도 따라붙었다. 그런데도 아비는 정신도 없이 눈만 떴다 하면 제 삶이 가여워 술을 찾던걸, 이내 아이가 조금 더 자라서는 숟가락 들 힘도 없다.   어느새 과년한 나이가 된 딸내미 시집갈 걱정으로 한숨 쉬던 때, 여식은 언제나 살갑게 아비에게 말을 걸며, 밥숟가락을 들 때마다 떠는 손을 다잡아 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는 같은  다짐 한다.


 이제나저제나 이 삶을 준 애처로운 부모.

끝내  병든 마음을 고치지 못한데도,

마지막 순간 광명을 찾는다면 그 일이 무엇이든 앞뒤 재지 않고 뭐든 해보겠다고.
 
그토록 수없이 구전돼서 닳고 닳은 이야기 속 작은 계집아이, 언제부터였을까?

이제  아이는 완전히 낙담해버렸다. 제 나름대로 작은 몸으로 다부지게 노력해도, 병든 아비는 따라주지 않았다.

 매일 밤 곁에 누운 아비의 신음에 뜬눈으로 밤을 보내며 잠시 툇마루로 나가 별 세던 숱한 밤. 그러다 제풀에 지쳐 잠이 들면, 순번 돌며 끼니 챙겨주러 온 어멈의 기척에 깨곤 했다. 그러다 때때로 어깨가 축 처져서는 매번 죽상을 하고 다니는 음울한 계집아이에게 동네 아이들이 찾아왔다.  물론 자기 부모들의 떠넘김에 못 이겨 찾아온 게 그네들 얼굴에 쓰여 있었지만, 꾸준히도 문을 두드려주었다. 하지만 매번 청이는 제 아비 점심 먹는 걸 도와야 한다는 말로 애들을 돌려보냈다. 어느새 그 작은 아이는 자신보다 아비가 더 가엾었다. 그리고 동시에 미웠다. 아비는 그간 한 번을 다정히 안아준 적이 없다. 어떨 때는 종종 아비가 짐 덩이 같은 자신을 흘려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몸이 지쳐서 그 낯빛까지 쳐진 것이라 생각하려 해도 그 눈빛이 한겨울 서리만치 서늘하다. 마치 그 어떤 정도 주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듯이 차갑다.
 

만약 스님 말마따나 전생이 있다면 아비와 자신은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못 이룬 연정에 죽어간 연인이거나, 서로에게 못될 짓을 한 원수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신과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어진 끈은 눈먼 아비뿐, 달리 애정을 줄 데도 없다. 온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가여워하면서 챙겨주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휑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아이는 스스로 말을 걸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벽을 보고 앉아있는 아비에게도 오늘은 날씨가 어떤 것 같냐고 창호지 문을 열어두고 하는 안부처럼, 늘 하는 그런 인사를 자신에게도 건넨다.  처음에는 그저 묵언 수행 중인 그의 곁에서 자신도 그만 벙어리가 될까 겁이 나 혼잣말을 했다. 그러다 점점 말이 말로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게 자연히 아이는 이야기 꾼이 되었다. 이제 아이는  다른 이들에게도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를 말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곤소곤 쭈빗쭈빗 조심스럽게 하던 말투도 점차 능청스러워졌다.

 어떤 날은 귀덕 어미와 밭에 갔다가, 냇가에서 빨래하다, 마을을 방문한 스님께 인사하다도 이야기 이 아이의 이야기 댐은 끝이 날 줄을 몰랐다. 그러다 이제는 남이 지어낸 이야기까지 가을날 도토리를 줍는 다람쥐처럼 주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자기가 수집한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도로 풀어 들려주었다. 어느새 마을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그 애를 마을 어귀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비록 그 작은 마을 안 정해진 반경 속에서만 쳇바퀴 돌듯 움직이지만, 언제나 그 이야기들만은 가지각색 그 향취까지 오만가지였다. 어쩌면 이대로 자기 스스로의 생을 구원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밤이면 어김없이 악몽이 찾아왔다. 벌써 여러 해 전 일인데도, 매번 조금씩 변조되어 생생하게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다부진 아이는 남의 이야기처럼 그날을 보려 했다. 그 일에 너무 빠져들지 않고,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만 보기로. 그렇지 않으면 어둠이 자신을 그대로 집어삼킬 테다.

                                        


 아이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아비는 잠든 아이를 엎고서 잘 보이지도 않는 산길을 더듬어 갔다. 이제는 세상만사가 다 고단하여 눈먼 나나 가문도 재산도 없이 시집갈 길이란 막연한 너나 더 남아 뭐하겠냐며. 인제 그만 부처의 염원을 담아 물길 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그렇게 차라리 내세를 기약하고자 했다. 다행히 이때 나무하러 뒷산에 올라가던 정초부가 부녀를 발견해 다시 마을로 데리고 내려왔다. 당시엔 그저 다들 눈도 뵈지 않는 양반이 우물가는 길은 기가 막히게 찾았다며 신기해했다.

                                 
그 사건 이후 몇 해가 지났을까, 이제 아이는 책쾌 심부름을 하다 뜬금없이 저잣거리에서 꽤나 인기 있는 이야기꾼이 되었다. 규방에서는 모두가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고대해 항시 여러 댁 아씨들의 몸종들이 문지방 닳도록 드나들었다. 아비도 이제 제법 짧지만, 대화란 걸 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는 어찌 됐냐고, 다음 편에서는 아무개를 정녕 그리 덜 거냐 질문도 하면서.
 
-이게 내가 알아낸 비화의 전부일세. 그리도 유년이 기구했다더군.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 아니,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나. 무슨 그리 싱숭생숭 끝나?
여태 알아본다는 게 그게 다인가? 게다가 청이가 그 심청인 줄 어찌 아나?
 
- 그럼 자네는 아나? 어느 마을 청이가 그 청이 인지? 왜 아예 용궁으로 가는 길도 동행해 알려달라 그러지 않고?
 
- 에에 왜들 이러는가. 누가 쓴 이야기면 어떤가 그리들.
정말 계집이 섰다고 이야기가 바라겠나.
 
- 그것이 아니라, 필자를 밝히는 일이 필사하는 자의 정성이 아니던가, 이 장안의 소설이 대체 작자 미상으로 남는다는 게 말이 되나? 이참에 그 필명으로 활동하는 자들 다 뒤져 보세나.
 
- 하여간 자네는 뭐든지 몸과 마음을 불살라 앞서가는 게 문제네.
이야기는 이야기를 두는 것이지. 다들 그리 심각해서야.
 
마지막 가만히 붓을 쥔 자, 두 벗을 두고 보다 끼어들기를.
 
- 애 보게들 이러다 새벽 다 넘어가겠네.
아무렴 어떤가, 이제나저제나 한 세상.
하여간 자신과의 인연을 지킨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세상 이야기라는 게 다.
 
 여기서 혼자 꿈쩍 졸고 있던 자가 급작스레 고개를 들고 방언을 한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아니 근데 개똥이는 언제 오나? 한참 지났는데 올 때가.
 
-그러게 말이네. 이러나저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가만있자, 이거!
 
 갑자기 두 손을 마주 잡고 침을 꿀떡 삼키면 눈알만 굴리더니, 불안하게 창호지 문 밖을 훑는다. 다들 웅성거리는데 이이는 여전히 말이 없다.
 
-자네 뭔가, 그 몇 방울에 벌써 취한 겐가?
 
-그래, 갑자기 뭣이야? 어?
 
- 우리 개똥이가 혹시.
 
-뭘 혹시? 말을 끝까지 하게.
 
-혹시나, 산군과 마주친 게 아니야?

  어? 이리 안 오니.
 
 사방에서 빈 사발이 그이의 봉두난발 위로 나른다.
 
-예끼, 부정 타겠네!
 
-재수 없게 무슨 그런.
 
 그러다 금세 일제히 숙연해지는 것이다. 호랑이 사고야, 조선 바닥에서 사계 내내 예삿일도 아닌 일인데, 그러고 보니 개똥이는 어디쯤이던가. 정말 그새 호랑이 밥이라도 된 것인가. 그렇게 갖은 수다를 떨던 양반들이 그새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끝에 앉은 이는 훌쩍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다행히 이 어색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만치 풀길 사이로 기척이 난다. 개똥이가 산성 길을 넘어 솜으로 칭칭 감은 뜨듯한 효종 갱 단지 메고서 온다. 이제 다들 일제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툇마루로 몰려나간다. 그만 제 신을 신는 것도 잊고서 흙바닥에 버선발로 뛰쳐나온 도련님들. 그렇게 이놈의 풍류를 즐기는 도령들 덕에 개똥이는 온몸이 풀벌레에 한껏 물어 뜯겼다. 그 모습이 퍽이나 안쓰러워서 또 여기저기서 자기 그릇의 전복이며 삼이며 모아서 내어준다. 비록 겸상은 못하지만 개똥이도 초당 마루 밑에 거적때기를 깔고서 나름대로 운치 있게 해장에 참여한다.


 그제야 한숨 돌리며 숟가락을 든 우리 개똥이.  이에 도포 자락 하나가 수줍게 잔을 건넨다.
 
“흠, 흠. 사실 자네는 해장할 것도 없지. 밤길 나선다고 물로만 축이고 갔으니, 어서 들게나.”
 
“그래, 이것도 들게. 이 청주 지게미 뜬 거로. 젤 위에 뜬 게 제일 귀한 법이니.”
 
“맞아, 자네가 들어야지. 우리도 들지. ”
 
“괜히 미안하구먼. 밤길 나서려니.

  아까도 물만 축이고 가고.”
 
그렇게 몇 각이 지났을까, 그새 도령들이 돌아가며 주는 대로 다 받아먹던 개똥이는 목부터 귀까지 빨개져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남정네들끼리 옹기종기 조는 사람 옆에 모여 주섬거리는 데, 대체 뭘 하나 보니 그이의 목과 등에 연고를 바르고 있다. 그 모습이 사뭇 양갓집 규수들이 연경을 보고 연지곤지를 찍는 격인데, 다들  저마다 손끝으로 세세하게 공들여 찍고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입들을 쉬지를 않는다. 괜히 자기들 때문에 물려 온 것이 미안해서인지 원래 많은 말에 저마다 하나씩 더 말을 얹는다.
 
“ 어휴 내 본디 길눈이 어두워서 ,

    이 야밤에 사람을 보내고.”
 
“그러게나 말일세, 그냥 우리도 참.

  그 술  좀  작작 할 것인데, 해장한다고 사람을         밤길에...”
 
“이거 이거 너무 부은 거 아닌가?

   한번 긁으면 끝까지 긁게 되는데.”
 
“그러니, 더 단단히 바르게.

   이게 뭔가 사람 몸에 어휴.”
 
“거참, 살살 바르게. 살살.

  밤새 대강 아물어야 덜 긁지.”
 
 다들 무릎까지 꿇고 너무 열중해 바늘귀 찾듯이 바르다 온몸이 망부석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입만은 분주한 도령들, 곧 입술까지 피로가 내려앉고 그제야 말을  멈춘다. 그

이에 그간 집중하느라 잊고 있던 숙취가 어깨 결림과 한께 몰아쳤으니, 곧 의관 정제 따위는 잊어버리고 너도나도 그대로 나자 빠는데, 이 뒷수습은  또 개똥이  몫이다. 저도  취해 비틀거리는  가운데  나무  지게  봇짐에서  이불을 끌어온다. 아무리  한여름 밤일지라도 우리 도련님들 입 돌아가면  안 되는 법이라 중얼거리면서.

 얼추  서너 명 장정들을 한 곳에  끌어다  모아 놓고는 그 위로 포근한 이불을  크게  펼쳐 놓는다.   


오늘도 어찌어찌 시끌벅적한 야밤이 지났다.


                           



 다음날.

 해는 중천이지만 그 누구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데, 얼떨결에 콧등에 앉은 하루살이 때문에 먼저 깬 이 도령.

 순간, 간밤에  모기에 물려 퉁퉁 부은 얼굴들과 마주한다. 차마 흔들어 깨울 여력도 없이 저 혼자 조용히 일어나 의관을 정제한다. 그만  간밤에 잠꼬대에  한쪽이 기운  갓을 쓰며   한 두어 번 헛기침을 해보지만, 다들 숨도 안 쉬고 취침 중이다. 


 사실 이제 별도리가 없다. 다만, 개똥이 목에 비단구렁이처럼 칭칭 감긴 벗의 팔을 가만히 풀어 주고 길을 나선다.


 정자에서 돌아서면서 한번, 초당을 머쓱히 돌아보고 조금 더 내려가 뒤돌아본다.


 저 치들은 과연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어째  누구 하나 코 고는 소리도 없이 고요하다.  


 이만  도령은 갓을 고쳐 쓴 뒤, 뒷짐을 지고 산마루 너머 마을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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