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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o Jan 24. 2021

작자미상02 -보드랍게

-어느새 잊고 있던 보드라운 날


 방학을 맞이해 서울서 손녀가 왔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기어 다니던 아이가 이젠 뛰어다니고 말도 많다. 그 작고 올망졸망한 입으로 쉬지 않고 이것저것 묻는 통에 종일 정신이 없다고. 연거푸 답이 없는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꾸할지 난감하다고 하소연하니, 옆집 윤희네 할멈은 노인네 치매 예방에 좋으니 또박또박 정성 들여 대꾸해주란다. 그건 댁이 우리 애가 얼마나 말이 많은지 몰라서 하는 소리지. 뭐든지 그 애는 세상 신기하고, 뜻깊고, 재밌으면서 이상하고.


“할무이. 할모이.”


한참 마룻바닥을 닦는데 바짓가랑이를 잡아채며 저 혼자 이야기한다. 그 앞에 가 한참을 듣다가 잠이 드는데, 아이가 연신 불러대 잠이 깼다. 또 무슨 일이고 하니, 농위에 있는 저거 꺼내 달라고. 저런 건 또 어느 틈에 본 건지, 자기 몸집보다 큰 묵은 앨범을 턱 하니 쌓아주었다. 그 작은 것이 그만 집채만 한 앨범을 무릎 위에 턱 걸치고는 숨도 안 쉬고 본다. 그제야 좀 잠잠해졌다. 이제야 한숨 돌리겠거니 고개를 돌리자니 요 녀석, 그새 말문이 터졌다.


“이봐봐, 할머니! 이 애는 누구야?.”


“어디, 누구긴 진찰이니 엄마지.”


“애가?.”


“왜 안 믿기나?.”


“진짜? 이렇게 작아?.”


“그니까, 쟤가 어릴 때는 키가 자그마해 걱정이었구먼.”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져서 그만 바닥에 쏟아질 것 같다.


“그니까, 이제는 이따 만치 큰데 그제?.”


“응, 엄마 안 같아.”


“고마, 봐라. 수진이도 곧 네 어미 만치로 큰다. 쭉 큰다.”


“히히, 진짜?.”

 제 손으로 얼굴을 막고 어린 것이 웃는다. 어떤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내 바짝 붙어서 귓속말을 한다.


“할머이, 있잖아. 엄마는 싫어해.

키 크다고 하면. 엄마는 큰 게 아니라 딱 좋은 키래.“


이내 비밀스러운 공모를 하듯 아이 귀에 더 가까이 입술을 대고 중얼거린다.


“그제, 맞다야. 갸가 딱 좋은 키라. 큰 게 아니라 그제?.”


 이렇게 열띠게 수다를 떨다가도 애들은 금세 노곤해진다. 앨범을 그만 곁에 야무지게 배게 잎처럼 두고 누워 버린다. 금세 들숨 날숨으로 코 고는 소리를 낸다. 때는 바로 이때다. 서둘러 앞마당으로 나선다. 전날 장독 위에 엎어둔 주스 공병들을 차례로 뒤엎어 놓는다. 애들이 도착하기 전에 가득 채워 줘야지. 집안일이란 게 어디 하는 티도 안 나면서 시간은 잘도 먹는다. 그러니 특별한 폼이 없는 날이라도, 틈틈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인제 그만 장독대를 열자 시큼 들큼한 매실 냄새가 콧잔등에 들이친다. 아 역시 이 냄새다. 이 냄새. 오늘도 스스로 감탄하면서 국자에 담뿍 퍼 한 병씩 찬찬히 채워간다. 그만 한참을 매실 냄새에 취해 있는데 문득 어떤 시선이 느껴진다. 누가 지나가나, 얕은 담장 밖을 두리번거리는데 손톱만 한 것과 눈이 마주쳤다. 저 콩알만 한 것이 냄새를 맡고 왔나. 이 할머니도 지지 않고 쳐다본다. 그래도 야무진 참새는 미동조차 없이 그이를 쳐다본다.


 참으로 별일이 다 있다. 저 겁 많은 녀석이 손을 훠이훠이 저어봐도 꿈쩍 안 한다. 이참에 인심도 쓸 겸 약지에 청을 묻혀 가져 가 본다. 어디 요래도 안 가나, 좀 더 가까이 가까이, 그놈의 미간 앞까지. 근데 정말 안 간다. 그저 잠시 그 작은 머리를 겨우듯 하더니, 이내 겁도 없이 총총 부리를 들이민다. 그렇게 태연히 몇 모금 쪼더니 다시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하여간 참새는 알다가도 모를 앙증맞은 앙꼬 빵들이다. 그러고 보니, 원래 이 동네에 참새가 많았다. 근래 들어 많이 안 보이지만.


 문득 처음 이 마을에 시집와 보냈던 가을이 생각났다. 그때 그이가 방학이라 그 주 내내 서울서 고향으로 내려와 있었는데, 그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작은 집안에서도 마주치면 원체 어색해서 저 스스로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마땅치 않았다. 원체 둘 다 말수가 없어, 만월이 뜬 보름날에 식을 올리고 추수 날이 되기까지 서로 나눈 말이 손에 꼽으니까. 그래서 그즈음에 보름달에 빈 소원은 오직 농번기가 하루빨리 끝나 그이가 등하교하기를, 그거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던가, 한 번은 부득이하게 마주치지 않기 위한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만 동선이 겹친 적이 있었다. 그이는 소여 물로 줄 건초더미를 수레에 가득 싣고 앞으로 밀며 가고, 나는 등 뒤에서 고추를 담을 소쿠리를 옆구리에 끼고 걸었다. 그저 가는 길이 같아서 각자 길을 가면 그만이라 생각하려 해도 혼자 민망해서 멀찍이 떨어져 그이의 등 뒤에서 걸었다. 한참을 그 답답한 등을 앞서고 걸으며 온갖 잡다함이 밀려왔다.

 계속 이리 살다가는 그만 마음이 꽉 막혀서 그만 요절할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이러다 영영 이곳에 정을 붙이지 못할 것 같았다. 벌써 개나리 목련 꽃잎이 잔머리에 붙던 때 연지곤지를 찍고 맞절한 지도 반년인데 지아비가 낯설다. 그 목소리조차 여태 익지 않았다. 아니, 목소리를 들은 적이라도 몇 번이었나. 서러웠다. 이대로 얼마큼의 계절이 더 지나야 그나마 나아질지 기약할 수 조차 없다. 어쩌면 영영 내 사람 같지 않을 수도. 그 사람도 나를 자기 사람이라 여기지 않겠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시간은 그냥 지나갈 뿐.

 무언가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사람도 부지불식간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에게 가는 것이 퍽 난감했겠으나, 나처럼 서럽게 울지는 않았겠지. 아직 열일곱이면 집에 있을 시간이 더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혼담이 오가더니, 혼인을 통보받았다. 그날부로 시집가기 싫다고 매일 밤 무명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여식을 어머니는 기어가 막혀서 하셨지. 아기 때부터 유별나더니, 너도 참 유난이라고. 어디 나이 많은 늙으신네한테 팔려 가는 것도 아니고, 나름 유식하고 점잖은 집안에 그것도 같은 닭띠에 가는 것인데, 대체 뭐가 그리 서러워 생떼이냐고. 누가 너를 내다 팔기라도 하였냐고. 그때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울음만 삭히던 게 다시금 억울했다.

 어떤 말을 해야 했을까. 그저 한 사람으로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결과는 바꿀 수 없대도, 한마디라도, 무슨 말이라도. 그래, 무슨 주장이란 걸 해야 했다고. 순간 옆구리에 낀 소쿠리를 놓치고서, 손톱 끝을 물어뜯으며 갔다. 그러다 문득 옆이 허전한 걸 느끼고 다시 몇 걸음 뒤로 뛰어갔다. 어디 이것도 주인을 닮아 하릴없이 흙바닥 모퉁이에 처박혀 있던 걸 도로 주어왔다. 그새 저만치 더 가버린 소달구지, 그이는 멀어져 있었다. 자기 처가 뒤따라오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냥 무심히 앞만 보고 간다. 이에 황망히 서서 그 뒷모습만 바라본다.   이때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드디어 길바닥에 나앉아 울기까지 하는가. 그것도 소리까지 내가면서 돌연 정신을 차려보니, 흙길 옆 논두렁에 작은 아기 새가 진흙더미에 빠져 푸드덕대고 있다. 거듭 질퍽한 고랑에 발이 빠진 채 동동거리는데, 그 꼴이 퍽 처량했다. 그대로 냅다 논두렁으로 뛰어가 치맛단에 진흙에 문드러졌는지도 모르고, 그 작은 것을 두 손에 고이 받혀 나왔다. 혹시 다리라도 접질렸으면 어떡하지, 그대로 길바닥에 꿇어앉아서 요란 떠는 애를 소쿠리에 올려두고 있었다. 이내 눈물은 쏙 들어가고, 이를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그이가 수레를 세워두고 걸어왔다.



“부인, 여기.”


“일단 집으로 데려가 말려줘야 할 듯싶소만. 그 소쿠리 안고 뒤 칸에 타시오.”


그렇게 그날은 그대로 공쳤다. 다음날은 아예 둘이서 안채에 틀어박혀 목이 쉬도록 우는 아기 새 곁에서 하루를 보냈다. 무슨 소꿉장난 하듯이 그 작은 애 하나를 데리고 둘이서 어르고 달래고. 그 덕인지 며칠 후부터 아기 참새는 낯 가림 없이 잘 지냈다. 사람 어깨에도 앉아 꾸벅 졸기도 하고, 손바닥에 미리 불려둔 낱알을 주면 야무지게 쪼아 먹었다. 그러다 한 번은 너무 먹어서 손바닥에서도 그만 꾸벅꾸벅 조는 애를, 빵빵해진 배를 위아래로 고르며 자는 애를, 가만히 보고 있던 당신이 집게손가락으로 살살 머리를 만져줬다. 그래도 미동도 없이 한 번을 움직이지 않고 곤히 졸더니만. 나는 또 그게 재밌어서 소매로 입을 틀어막고 웃었지. 이에 당신이 엄숙하게 말했는데, 뭐랬더라. 그것도 엄청 심각하게. 그래. 아기들은 원래 잠이 많다고, 잠이 많다고.

 그래, 그날 이후로 더는 이 동네가 숨 막히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당신, 제법 목소리가 좋았지. 언젠가부터 나는 바느질하면 그이가 그 곁에 앉아 책을 읽었지. 나는 뭘 그리 골똘히 재밌게 보는지 곁눈질하면, 그만 좀 고조 곤 소리 내서 읽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걸로 글을 다 배웠지. 꼭 방송 기지국 성우들처럼 발음도 정확하고, 읽는 폼도 하나하나 세심해서 듣는 맛이 있었는데 항상.

 내 본디 성격이 사내애 같아서 생전에 그 책 읽는 소리가 좋다고 표현을 안 했기로 서니, 좀 더 읽어주고 가지. 뭘 그리 급해서 먼저 갔나. 사람 참 야박하게. 아니면 옛사람들 말마따나 첫날밤에 각시가 먼저 불을 꺼서 부정을 탄 건가. 그런 건 원래 지아비가 끄는 건대말이지.

럼아니, 허나 나도 할 말은 있지. 그때는 창호지 문밖으로 난 그림자들이 무서웠거든. 허니 얼른 안팎으로 난 그림자부터 지워야겠다 싶어 그랬지. 그 어린것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럼 얼마나 무서워.  그때 당신은 또 얼마나 꾸물거리는지, 꽤 한참을 넋 놓고서 새신부보다 수줍게 있길래 그냥  내가 먼저 불을 꺼버렸지.


이처럼 한참을 옛일 속에서 헤매니,  다른 아기 새가 어느새 곁에 와 어깨를 두드린다.


 “있잖아. 할머니, 할머니.”


아니 무슨 애가 발소리도 안 내고 오나,


“아휴, 놀라. 아가 언제 왔어?.”


저도 순간 움찔하더니 이내 다급히 고사리손으로 할미 입을 틀어막는다.


“수익, 할머니 지금 조용히 말해야 해. 큰 소리 안돼.”


이건 또 무슨 놀이인가 영문을 몰라 일단 잠자코 있어 본다. 아이가 이내 자기가 누워있던 툇마루를 가리켰다.


“저기 봐봐. 저기 봐!”


아이가 좀 전에 앨범 보면서 집어먹다 여기저기 흘려 만든 하얀 강냉이밭에 손님이 왔다. 아직 솜털도 덜 난 아기 참새 서너 마리가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여있다. 

 오늘이 무슨 날은 날인가. 겁도 많은 애들이 오늘따라 집안까지 들어오니 이상하다. 아까 장독 위에 있던 애가 다가 아니었나. 이 주변에 둥지가 있었나 얼떨떨한 틈에 아이가 팔을 잡아끈다. 결국 둘이서 까치발을 들고 조심히 그 곁으로 가본다. 근데 이러다 도로 날아가 버리면 속상할 텐데. 너무 가까이 가는 거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의외로 애들이 먹는데 정신이 팔린 건지, 제 부리가 닿을 만치 코앞으로 다가가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고것 참 신기하네. 이에 신이 나서 제 앵두 입술을 오므려 바람 소를 낸다. 제법 피리 소리가 나는데, 자기가 하고도 놀랐는지 또 놀란 토끼 눈으로 할미를 올려다본다. 

 뭐가 저리 재밌을까. 이제는 아예 과자를 올려둔 손바닥 위로 두 마리가 쭈뼛쭈뼛 올라왔다. 그런데 이 와중에 저 혼자 강냉이 봉지를 차지한 한 녀석, 저 혼자 한참을 숨넘어갈 듯이 두 날개를 퍼덕이며 쪼는데, 저러다 봉지를 뚫겠다 싶다. 잘못하면 비닐도 먹겠는데. 그렇게 아기 새 삼 형제의 가열한 시식회가 한참을 계속됐다. 그러다 너무 먹어 춘곤증이 왔던지 감긴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고것 참 웃기는 녀석들이다. 우리 집 아가는 또 이에 맞춰 제 팔을 길게 뻗은 채로 엎드려 그 모습이 흠뻑 취해있다. 언제 저리 자리를 잡아서는 그 모습이 귀여워 어쩔 줄 몰라 온몸을 배배 꼬며 작게 속인다.


“할머니, 할머니 재 봐봐. 졸리는가 봐. 어떡해!.”


“그러게, 아기들은 원래 잠이 많아. 잠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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