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 철학용 구급상자.
"지난 삼천 년의 세월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깨달음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리."
괴테
철학용 구급상자.
'소피의 세계'는 지루할 수 있는 철학의 역사를 단숨에 읽히도록 하는 매력이 있다.
개인이 자기 자신으로 현존하기 위해서 지난 시간을 들여다볼 필요는 분명하다. 단, 역사가 짧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나의 과거 말고 전인류 역사의 과거를 말이다. 소피의 세계는 자칫 엄두가 나지 않는 삼천 년의 역사를 단 한 권으로 일목요연히 정리하고 있다.
"무엇을 반복하는가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결정한다."
나는 벌거벗은 원숭이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반복할 것인가.
인간은 자유를 지닌 객체로 태어난다. 삶의 시작은 타의적이지만, 삶의 사유는 자의를 강요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선택이 더 중요시된다. 군중이란, 특정 사회생활양식(사고방식)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이들을 일컫는다. 군중의 태도는 분명하다. 본능과 감정에 충실하다. 그러나, 사람은 이성을 기능할 수 있는 존재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하는 라틴어 명제 속에서 "내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나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으니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했다.
미적 세계의 수준에 머무르지 말고, 의심할 수 있음을 말했다.
스피노자는 "어떤 렌즈를 통해 관찰하느냐에 달려있다"라고 했다.
스토아적 사고, 모든 일이 필연적이니 모든 사건에 동요하지 않는 평정을 갖고 대하는 것이 중요하며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지 말 것을 요구한다.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 하나는 비옥한 땅에. 하나는 척박한 땅에. 열매를 맺을 나무는 무엇인가?'
내 안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발현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상식적 합리주의는 17세기부터 이미 존재했다.
철학 역사를 읽고 공부하는 과정이란
재미없고, 실생활과 동떨어진 학문적 연구가 아니다.
내가 "나"로 존재하고, 삶을 사유하기 위한
‘학습 과정'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성'을 갖고 태어난다. 이러한 "초기 이성"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상태다. 한 장 한 장 채워나가야 하는 과정이다. 건너뛰어야 할 과정은 없다. 그렇게 현대 이성까지 도달해야 현시대에서 내가 무엇을 반복할지 선택하고, 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현대 20세기의 신화.
속임수와 현혹(점성술, 타로 등)에서는 단 하나의 참된 경험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잘 되는 장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한다.
자신들의 힘든 일상을 몰아낼 만한 다른 어떠한 것, 신비한 것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한 우연을 많은 사람들이 '모아들이는 게' 문제다. 마치 무시 못할 증거처럼 보이게 현혹하지만, 이것은 마치 당첨된 복권만 바라보는 복권 게임이다."
신화란, 인간에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이야기.
인간 인지의 역사는 신화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2024년(실은 46억 년이 넘지만) 현재에도 과거의 신화는 사그라들고, 현대에 맞는 신화가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는 중임을 "밖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군중을 향해서 신화를 팔아서 돈을 번다. 사람은 신화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존재다. 번 돈으로는 군중과 거리를 두고 사람으로 산다.
군중은 돈이라는 신과, 이야기라는 신화를 원한다.
사람은 이를 배려해 원하는 것을 주고자 애쓰고, 불쾌해할 말과 행동은 절제하는 것이 사람의 태도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하면서 내겐 많은 내적, 외적 변화가 진행되었다. 생각, 행동, 반성이 서로 혼합, 삭제, 재창조를 반복했다.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에 따른 것일 수도, 이성과 감성 외에 감정을 분리하는 훈련이 기능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해석이 완벽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과거로부터 현재를 채워나가지 않으려는 의식적 노력을 계속하고 있음에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