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무엇을 원하는가?-
대한민국 정부를 제외하고 전 세계가 분주하다. 트럼프 때문이다.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행정명령을 남발하며 대내·외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대외적으로 예상했던 관세와 예상치 못했던 영토 야욕을 드러내며 전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난 10일, 트럼프는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철강과 알루미늄에 25% 관세를 부과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안토니오 코스타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그리고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불과 이틀 만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철강과 알루미늄 대미 수출 규모에서 각각 1위와 3위인 캐나다와 유럽연합은 트럼프의 관세 정치를 예상은 했지만, 발 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지난 10일, 구글은 전 세계인들이 사용하는 자사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인 구글맵(Google Maps)에서 멕시코만의 명칭을 미국만(Gulf of America·아메리카만)으로 변경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구글은 정부의 공식 지명을 따라온 오랜 관례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멕시코는 하루아침에 자신의 앞바다 이름이 바뀐 것이다. 덧붙여, 트럼프의 백악관은 이튿날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통신사인 AP통신에 백악관 출입 금지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AP통신이 멕시코만을 ‘미국만(아메리카만)’으로 변경하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촌극이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서 이런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미국의 전임 대통령이 있다. 그는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다. 미국의 CNN은 지난 12일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이었던 매킨리를 특집으로 다루며 두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하나는 ‘관세 왕’(tariff king)이고, 다른 하나는 ‘트럼프의 우상’(Trump’s idol)이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며 굳이 잊혀있던 매킨리를 소생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 대중들과 언론들은 매킨리의 관세 정치를 트럼프와 연결시키고 있다. 매킨리의 관세 왕 이미지는 트럼프의 정치적 의도를 숨기는 도구로는 유용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 매킨리의 정책과 시대적 맥락을 살펴보면, 트럼프가 매킨리를 언급한 진짜 이유는 매킨리의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이다. 그리고 그 권한을 활용한 영토 야욕이 진짜 목적이다.
1843년 1월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매킨리 대통령은 1860년대 남북전쟁에 북부군으로 자원 입대해 보급병으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뉴욕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7년 동안 지방 검사로 근무한 뒤, 공화당에 입당해 연방 의회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1890년, 매킨리 하원의원은 평균 수입 관세를 38%에서 무려 49.5%로 상향하는 법안을 주도해 통과시켰다. 이때부터 그는 ‘보호주의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며 유력 정치인이 된다. 결국 그는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승리하고, 1900년 재선까지 성공하며 새로운 20세기 미국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재선 이듬해인 1901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이런 매킨리에 대한 CNN의 ‘관세 왕’이라는 평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미국 정치사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 1861년부터 1929년 경제 대공황까지를 공화당의 황금시기로 평가한다. 이 황금시기를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1) 1861년~1881년: 링컨 대통령부터 5차례 연속 공화당이 석권한 시기, 2) 1881~1897년: 공화당과 민주당이 두 차례씩 집권한 시기, 3) 1897~1933년: 우드로 윌슨을 제외하고 모두 공화당이 집권한 시기다. 공화당의 관점에서 보면 제2차 황금시기의 문을 연 대통령이 바로 매킨리다.
매킨리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정치적 배경은 18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landslide)을 거두며 상·하원을 장악했다. 이 중간선거로 민주당의 하원 의석 점유율은 61%에서 29%로 급락했다. 매킨리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1896년 대선을 승리한 것이다. 이에 당시 매킨리 대통령은 자신의 대표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관세를 고수하거나 오히려 더 높일 수 있었다.
또한, 매킨리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미국은 1873년 이후 지속적인 경기 침체를 겪고 있었다. 이 시기에 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농산품인 밀과 면화의 가격이 하락하면서 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동시에 전기, 석유, 철강 등을 중심으로 한 소위 2차 산업혁명으로 과잉생산이 가능해지며 경기침체 현상은 오히려 고착되었다. 미국의 실업률이 당시의 경기침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892년 4%이던 실업률이 1893년 9.6%, 1894년 16.7%까지 치솟았고, 매킨리 행정부가 들어서고 1899년이 되어 7.7%로 떨어졌다.
이에 일반인들은 물론 언론들도 매킨리 행정부가 고관세 정책을 펼치며 오랜 경제침체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매킨리 대통령이 경제침체를 벗어난 것은 고관세 정책을 고수하지 않고 오히려 저관세 정책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관세 왕’으로 불리는 매킨리가 저관세 정책으로 미국 경제를 회복했다는 점이 다소 의아스럽다. 180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미국은 2차 산업혁명으로 생산되는 물품을 판매할 해외시장이 필요했다. 실제 미국 내부적으로 경기침체를 회복하고 노동자들의 이익을 확보하는 방안은 고관세 정책으로 국내 시장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 저관세 정책으로 원자재를 저렴하게 확보하고 이를 재생산해 해외시장에 판매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선순환이 일어나야 노동자들의 완전고용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실제 더글라스 어윈(Irwin) 다트머스 대학교 경제학 교수는 19세기 말을 팽창의 시기로 정의하며, 당시 세금은 미국의 경제성장에 큰 영향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보다 앞서 언급한 전기, 철도 등의 발전이 산업화를 촉진했으며, 이와 함께 자유로운 이민으로 인한 저렴한 노동력의 유입이 중요한 요소였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매킨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유무역 정책으로 선회했다고 밝힌다. 결국, 매킨리는 ‘관세 왕’으로 평가하는 것은 반은 틀린 것이며, 트럼프가 관세 때문에 매킨리를 소환한다는 주장 또한 반만 맞는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였던 월터 라페버(W. LaFeber) 코넬대 교수는 두 가지 이유로 매킨리 대통령을 제왕적 대통령으로 정의한다. 먼저, 인사권이다. 매킨리는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는 자신의 사사로운 측근을 중용했다. 예를 들어, 1897년 스페인 대사를 임명하는 과정에서 외교 경험도 없고 스페인어도 못하는 우드퍼드(S. Woodford) 의원을 공화당 중진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사에 임명했다. 그리고 매킨리는 자신이 아끼는 정치 참모였던 마크 해나(M. Hanna)를 상원의원으로 만들기 위해 상원의원이었던 존 셔먼(J. Sherman)을 국무장관에 기용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매킨리의 이 같은 인사권 행사는 트럼프가 1기에 자신의 장녀인 이방카를, 이번 2기에선 자신의 장남인 트럼프 주니어를 활용하는 것과 닮아있다.
다음은 외교권이다. 매킨리는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의회를 거치지 않거나 선전포고 없이 해외에 파병한 선례를 남겼다. 이는 미국 헌법에 규정된 연방 의회의 외교권에 제동을 건 정치적 행위이며, 동시에 대통령의 외교권을 확대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실험이었다. 실제 매킨리 전후로 대통령의 외교에 대한 의원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매킨리 이전 의원들은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했다면, 1898년부터는 대통령의 의견을 ‘듣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했다. 이에 학자들은 매킨리는 적어도 외교에 있어 대통령을 ‘선출직 왕’(Elective Monarchy)의 지위로 스스로 격상시켰다고 분석한다.
결국 매킨리는 인사권과 외교권에 있어 제왕적 대통령이 되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의 영토 확장이었다. 매킨리는 인사권을 활용해 영토 확장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분명히 했고, 외교권을 활용해 실제 영토 확장을 이뤘다. 먼저, 인사권을 활용해 영토 야욕을 드러낸 것은 1900년 재선 당시 제국주의를 미국의 가치로 주장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것이다. 1899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자신이 집필한 『분투하는 삶』에서 외교의 바탕은 군사력이며, 이에 기반한 팽창주의 외교가 미국의 안정과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과의 전쟁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음으로 외교권, 즉 전쟁을 통해 미국의 영토를 태평양 너머까지 확대했다. 1896년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매킨리는 하와이 병합, 해군력 증강, 니카라과 운하의 건설, 서인도제도에 해군기지 건설 등을 자신의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럼에도 1898년 초기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 문제로 스페인과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나 1900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1898년 7월 하와이를 병합하면서 카리브해만이 아니라 태평양 너머 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결정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손쉽게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파리조약에서 2,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필리핀을 양도받고, 스페인으로부터 쿠바에 대한 영유권 포기도 얻어낸다. 또한, 패전국인 스페인은 푸에르토리코와 괌까지 미국에 헌납하기에 이른다. 1898년 전쟁으로 미국은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스페인은 지는 해가 된 것이다. 외교권, 즉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중남미, 태평양, 그리고 아시아 지역의 영토를 확보한 매킨리의 미국은 미주 대륙을 넘어 미국 외교의 원칙을 세계 무대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최근 트럼프의 그린란드, 멕시코만, 캐나다, 파나마 운하, 심지어 화성까지 이르는 발언들을 그냥 하는 말들이 아니다. 트럼프가 생각하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매킨리 시대의 영토 확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