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크라이나전쟁, 그리고 미국과 유럽연합-
외교사에 2025년 2월 28일은 길이길이 기록될 것이다. 정상 간 대화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오간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많은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이 ‘고성으로 언쟁’을 벌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 영상을 보면 미국 JD 밴스 부통령이 젤렌스키에게 면박을 주고 이에 젤렌스키가 대응하자, 트럼프가 나서서 젤렌스키를 협박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상황 묘사다.
자신이 임명한 JD 밴스 부통령과 정상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 사이에 고성이 오가자 트럼프는 마치 남의 일인 양 방관한다. 그러다 젤렌스키에게 모욕적으로 말을 내뱉는다.
“너(우크라이나)는 우리(미국)에게 더 많이 감사해야 해!”
“너는 지금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는 도박을 하고 있는 거야!”
“네가 러시아와 협정을 맺든지 아니면 우리는 이제 빠질 꺼야!”
말도 안 되는 이 장면이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송출되자 유럽은 바빠졌다. 르몽드(Le Monde)에 따르면,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폴란드 투스크 총리, 독일 슐츠 총리, 영국 스타머 총리, 그리고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등은 즉각적으로 젤렌스키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리고 지난 2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유럽 정상들을 런던으로 불러 우크라이나를 주제로 정상 회의를 주재했다. 이렇게 숨 가쁘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국제정치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유럽연합의 쇠퇴와 개별 국가의 부활이다. 즉 개별 국가 중심의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이다.
미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Politico)에 따르면,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충돌 이후 유럽연합(EU)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나라의 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카야 칼라스(Kallas)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트럼프를 공격하며 다음과 같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했다.
“오늘, ‘자유세계’에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해졌습니다. 이 도전을 해결하는 것은 우리 ‘유럽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Today, it became clear that the free world needs a new leader.
It’s up to us, Europeans, to take this challenge.”)
에스토니아 총리 출신의 칼라스 고위대표가 던진 이 메시지는 정치인들의 발언이 그러하듯 정치적이다. 먼저, 자유세계(free world)를 언급하면서 트럼프의 등장을 기점으로 과거 미국과 유럽 중심의 자유세계에서 더 이상 미국이 리더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리더는 단수(a new leader)로 표현되어 있다. 독일, 프랑스와 같은 유럽의 어느 특정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 의미는 다음 문장에서 복수로 쓰인 ‘유럽인들’(Europeans)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그녀가 말한 자유세계의 새로운 리더는 어느 하나의 국가가 아닌 유럽인들과 유럽 국가들의 연합인 ‘유럽연합’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두 번째로 많은 금액을 지원하고 있다. 위 <사진-3>은 독일 싱크탱크인 킬 인스티튜트(Kiel Institute)가 지난 2022년 1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우크라이나 지원 현황을 추적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약 173조 원(1,197억 달러)을 지원한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은 약 74조 원(513억 달러)을 지원하며 2위를 기록했다. 1위인 미국과의 격차가 약 100조 원에 달하지만, 유럽연합 뒤를 잇는 국가들의 지원 규모를 보면 카야 칼라스 고위대표가 하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3위인 독일은 약 26조 원, 4위인 영국은 약 22조 4천억 원, 5위인 일본은 약 16조 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유럽연합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안보 위기 속에서 우크라이나를 두고 미국, 러시아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만 보이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2일 런던에서 열린 정상회의도 개별 국가들 중심이었고, BBC, 르몽드, 폴리티코 등 대다수의 언론 매체들도 유럽연합이 아닌 개별 회원국 정상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라는 침략자와 우크라이나라는 희생자가 있다’라며 모호해지고 있는 이 전쟁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밝혔다. 독일의 슐츠 총리는 ‘우크라이나인들보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없다’라며, 우크라이나 지지 의사를 재확인했다. 이 외에도 벨기에, 폴란드, 네덜란드, 스페인 정상들의 발언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심지어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닌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와 호주의 앨버니지 총리 발언까지 주요 뉴스가 되고 있다.
이렇게 유럽연합은 보이지 않고, 개별 회원국이 두드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와 이탈리아의 멜로니 총리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유럽연합 회원국 정상 가운데 극우 정치인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먼저 오르반 총리는 트럼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SNS에 “강한 사람은 평화를 만들고, 약한 사람은 전쟁을 만든다”라며, 많은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트럼프가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고 칭송(?)했다. ‘Thank you, Mr President!’를 외치면서.
다음으로 멜로니 총리는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과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고 있는 미국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는 모양새다. 그녀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라며, ‘지체 없이’(without delay) 미국과 유럽의 정상회담을 요구하고 나섰다. 즉, 이 틈을 타 중재자 외교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사태를 두고 일어난 일련의 상황을 정리하면 크게 3갈래다. 첫째, 지속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다. 여기에 자유주의 노선을 천명하는 호주, 캐나다 등과 같은 국가들도 포함된다. 둘째, 트럼프의 미국과 미국을 지지하는 유럽의 헝가리다. 분명 바이든 행정부 당시 미국은 나토를 중심으로 유럽과 함께 러시아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런 기류가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전면적으로 바뀐 것이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이번 2월 28일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만남인 것이다. 마지막은 이 둘의 대립 사이에서 나름 중재자를 자처하고 있는 이탈리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탈리아의 멜로니 총리가 기본적으로 트럼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럽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정치적 노림수인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미국은 유럽연합과 나토를 중심으로 한 대서양 동맹을 중시했다. 반면, 트럼프는 1기부터 대서양 동맹은 물론 유럽연합과 나토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에 유럽연합은 2022년 이래로 유럽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트럼프의 재등장 이후 유럽연합은 설 자리를 점점 잃고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유럽연합이 미국 다음으로 많은 돈을 쓰고 있으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유럽연합은 보이지 않고, 개별 국가들만 부각되고 있다.
유럽연합이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나름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유는 1990년대 발칸지역에서 경험한 유럽연합의 무능력과 관계가 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이듬해 유럽연합은 마스트리히트조약을 통해 단순히 경제 공동체에서 정치·경제 공동체로의 전환을 선언한다. 이는 국제정치사에서 유례없는 국가연합으로,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었다. 야심 찬 계획과 달리 1990년대 초 발발한 발칸 지역의 내전은 정치와 안보 분야에서 유럽연합의 무능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당시 유럽연합은 발칸 위기가 유럽 내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발칸반도의 화약고’로 불리는 코소보 지역에서 무려 1만 3천여 명이 숨지는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고, 결국 미국이 개입하면서 이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국제적으로 비웃음거리가 된 유럽연합은 이후 경제 통합을 기반으로 군사안보 분야에서의 통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 유럽연합은 2000년대 유로화가 도입되고, 15개의 회원국에서 28개 국가로 급성장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과거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이 유럽연합은 물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면서 유럽연합은 단순히 경제 공동체를 넘어 안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대 유로존 위기로 시작된 유럽연합의 위기는 난민과 브렉시트 이슈로 이어지며, 유럽연합 공동체의 위기를 해결하는데 하나의 회원국에 지나지 않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단연 돋보이는 기현상이 펼쳐졌다. 그리고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속에 트럼프의 재등장은 유럽연합에 악재다. 결국, 이번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사태에 내재된 숨겨진 정치적 함의는 유럽연합이 설 자리가 없는, 즉 개별 국가 중심의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