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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Feb 26. 2021

남편분이 가정적이시네요

제가 더 가정적입니다만


내가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육아휴직을 신청하니 사람들이 물었다.


"휴직은 얼마나 하세요?"
"1년만 휴직하면 아이는 누가 키워요? 친정 엄마가 봐주세요?"
"돌쟁이를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애엄마가 2~3년은 데리고 키워야지~아이고 그 어린애를.. 짠해라"


사람들은 나의 휴직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고 1년만 하겠다고 하니 매정한 엄마 딱지를 붙여주었다. 첫째 아이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직장과 주변 지인들에게 말했을 때, 대부분의 반응은 이러했다고 한다.


"대단하세요!"
"멋지시네요."
"진짜 가정적이시다."
"왜 네가 육아휴직을 해?"


첫째 아이 때도 둘째 아이 때도 내가 육아 휴직을 한다고 했을 때 한 번도 대단하다거나 멋지다거나 가정적이다라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당연히 '왜 육아 휴직을 하냐'라고 묻는 사람 또한 한 사람도 없었다.

사회가 변해 남자도 가사와 육아를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전 세대 남자들에 비해 증가한 것일 뿐 아직도 가사와 육아는 엄마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엄마가 육아 대신 일을 하게 되면 양가의 '할머니'가 아이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도 만연하다.

왜 더 건강하고 1차적 책임을 가진 '아빠'가 아니고 '할머니'를 엄마의 대안으로 떠올리는가. 가사와 양육자 역할의 빈칸에 여성만이 지는 시대는 언제쯤 바뀔 수 있을까.




자는 가사와 육아를 전제로 일까지 잘해야 사회에서 인정받지만 남자는 가사와 육아를 잘 '도와주면' 좋은 남편, 가정적인 남편이라고 상찬 받을 수 있다.

특히 '가정적'이라는 표현은 첫째 아이 육아 때 남편과 갈등의 씨앗이 되었던 터라 남편이 받은 상찬이 썩 달갑지 않았다.

당시 나는 어깨를 60도 정도밖에 들어 올리지 못하는 몸상태로 독박 육아 중이었는데 그럼에도 '아내'라는 명분에 맞게 남편 퇴근 전에 집안 정리와 저녁 준비까지 해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늘 시달렸다.

그러나 남편은 일이 바쁠 땐 차치하고서라도 회식이 있는 날도 빠지고 일찍 퇴근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3차까지 안 가고 2차만 하고 오는 것'이 큰 배려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것은 혼자 생각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날은 주변에서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본인 의지였는지 대뜸


    나 정도면 가정적인 거지.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신혼 때부터 남편이 설거지와 청소를 '도와준 것'이, 회식 3차를 안 가는 것이 그렇게 가정적인 일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여자에게는 하루 종일 가사를 해도 가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데 남자들은 약간의 '도움'으로 가정적이라는 칭찬과 자부심에 저리 당당한 것인가'


내 앞에 있는 이 남자보다
백배 천배 가정적인 건 나인데!


왠지 모를 분함에 다시는 그런 표현을 쓰지 말라며 남편과 크게 다투었는데 4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은 가정적이란 말을 듣고 다닌다니.



남편은 육아휴직 후 가정적인 남편이 아니라 그냥 동반자가 되었다. 동반자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짝이 되어 함께하는 사람' 남편은 가사도 육아도 혼자 해보고 스스로 해보면서 함께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아니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신체적 힘듦을 나누어서만이 아니다. 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것들을 통해 가사와 육아는 신체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사와 육아에서 움직이는 몸보다 먼저 필요한 건 무엇을 할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배우자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식사 준비 전에 냉장고에 어떤 재료가 있어 무슨 음식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하고 오늘 빨랫감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야 세탁기를 알맞은 모드로 작동시킬 수 있다.(옷마다 붙은 세탁 라벨을 확인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아기에게 분유를 주기 위해서는 매번 아기가 먹은 양과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여담이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분유 탈 때 몇 숟가락째인지 까먹으면 안 된다는 것. 분유를 안 타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게 다섯 번째인지 여섯 번째인지.. 헷갈릴 때의 그 마음을.. )

아기 방을 환기시키거나 방의 온도와 습기를 체크하는 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자칫 놓치기 쉽다.

이런 과정을 안 겪어본 사람들이 "밥은 밥솥이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데 뭐가 힘드냐", "애는 낳아 놓으면 알아서 다 큰다"라고 말하던 것은 아닐는지.




가사와 육아는 공동으로 할 때 일의 효율도 높아지고 각자 혹은 함께하는 여가시간도 늘어난다. 무엇보다 마음속 분노의 자리에 서로에 대한 위안을 대신 놓을 수 있게 된다. 

사회 분위기 부부가 함께 육아를 위해 휴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쪽으로 변화하면 좋겠다. 그래서 더 이상 '가정적인 남편'이라는 말은 쓰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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