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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Mar 26. 2021

그 남자 망손, 그 여자 금손

각자 잘하는 일을 하자.



#결혼 전


그 남자

운전미숙으로 애인의 차를 자주 망가뜨린다. 눈 오는 날 와이퍼를 억지로 세우다 부러뜨리고 주차하다 앞 범퍼를, 커브 돌다 뒤 범퍼를 찌그러뜨렸다. 애인의 1년밖에 안 된 새 차였다.

주차할 때 수 번 왔다 갔다 하더니 처음과 같이 주차한다.

내비게이션에 무한 의존하지만 경로를 이탈했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차나 휴대폰의 기능을 1/3 정도 알고 있다.

음식이 나오면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카메라 작동법은 잘 모른다.


ㅡ그 여자

운전경력 7년 만에 나만의 새 차를 갖게 되었다. 애인이 새 차를 자꾸 망가뜨려 운전을 도맡아 한다.

주차는 가능한 한 번에 정확히 한다.

몇 번 가본 길은 내비게이션 없이도 다닌다.

차나 휴대폰의 기능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음식이 나오면 그냥 먹으려다 카메라를 드는 애인 눈치를 보며 플레이팅을 다시 해놓는다. 카메라 작동법은 잘 숙지하고 있다




#결혼 후


ㅡ그 남자

벽에 못을 박다가 큰 구멍을 내놓는다.

카시트를 장착하다 망가뜨린다.

원터치 텐트를 펼 줄만 알고 접을 줄은 모른다.

아기 장난감 건전지 교체할 때 나사가 안 풀린다고 부른다.

건전지를 갈았는데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부른다.

지퍼가 달린 물건들의 지퍼를 다 뽑아버린다.

물 떨어지는 보일러 밑에 신문지만 깔아놓았다가 아래층의 항의를 받는다.

새로 산 벤치형 의자를 1시간 넘게 조립해보다가 불량이라며 반품하라고 한다.

 

ㅡ그 여자

구멍 난 벽을 점토로 메우고 그 옆에 못을 박는다.

고장 난 카시트를 도구들을 총동원하여 고친다.

텐트 접는 법을 설명하다가 그냥 직접 한다.

드라이버를 오른쪽으로 돌리는 그에게 왼쪽으로 돌려야 풀린다고 말한다.

건전지는 +,-를 잘 보고 끼우라고 말한다. 다음부터는 그냥 직접 한다.

고장 난 지퍼는 직접 고칠 수 없어 세탁소에 맡긴다.

보일러에서 떨어지는 물이 세숫대야로 떨어지도록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미끄럼틀을 만든다.

남편 출근 후 20분 만에 벤치를 조립해 앉아 커피를 마신다.





남편은 공구나 기계를 다루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연애 시절과 신혼 때만 해도 '남자가 이런 것도 못해?'라는 생각에 자주 핀잔을 주거나 다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남편의 장점은 보이지 않고 미숙한 면만 보였다.

남편이 잘하지 못하는 일을 내가 하면서도 '대신'한다는 생각에 '나만 고생한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연히 다툼은 반복되고 서로에 대한 불만 늘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왜 내가 여자와 남자가 잘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라고 느꼈다. 나 역시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남아있었단 사실에 놀라고 반성했다. 


흔히 남자가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들을 남편이 잘 못하듯이 여자가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들을 나 역시 잘 못하고 산다. 오히려 우리 부부는 반대의 성향들을 더 많이 갖고 있다. 사실 그 성별에 따른 성향이라는 것도 그렇게 사회화되고 학습되어 확률적으로 높은 것일 뿐이다. 


성별의 성향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성향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의 잣대로 결혼 생활을 하려 하니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선포하듯 말했다.


각자 잘하는 일을 하자.


나는 남편 '대신'이 아니라 나의 일로 집안에서 공구를 사용하거나 기계를 다루는 일을 맡아서 한다. '대신'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그런 일이 재미있다. 못도 박고 전등도 교체하고 새 제품 조립도 하고 고장 난 물건들도 고친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맥가이버 같다며 물개 박수를 쳐준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고 옛날이야기도 원 없이 해준다. 아이가 원하면 책도 몇  권이든 읽어준다.(나에게도 첫째 아이 모유 수유 때 나란히 앉아 '니체 극장'을 낭독해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요리 비책을 쓰는 남자가 된 후에는 식사 준비도 남편이 한다. 나는 남편 요리에 물개 박수를 쳐준다. 야식 앞에서는 좀 더 세게 친다.


어느새 다툼이 줄었고 가사에 드는 총시간도 줄었다. 서로 잘하는 것을 하니 버퍼링 없이 일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다투며 보낸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지만 그 대가로 배우고 달라진 지금에 감사한다.





딸아이가 아빠랑 옷을 입다가도 지퍼는 나에게 올려달라며 온다. "아빠는 다 망가뜨리잖아. 엄마가 다 고치고." 아이도 안다. 아빠는 망손이고 엄마는 금손이라는 걸.


하지만,  망손이 한 편으로는 따뜻하고 다정하여 함께 살게 되었고 이제는 같은 책장을 넘기는 손이기에 더없이 믿음직스럽다.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의 어느 사진처럼 나도 망손을 잡고 함께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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