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하며 두려운 것 중 하나는 '야근'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야근을 피할 수 없는 환경 - 구성원을 갈아 넣어야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두렵다. 야근 시즌이 언제 끝날 지 기약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버틸 수 있지만, 어쨌거나 하루 10시간 이상 회사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일은 달갑지 않다.
한 인간이 초과 근무를 할 수 있는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전 직장에서 꽤 많은 양을 소진했다. 새벽 출근, 택시 퇴근, 주말 출근... 지금 직장도 지옥의 야근 시즌이 있었지만, 내가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꽤나 빨리 해결해줬기 때문에야근이나 주말 출근이잦은 편은 아니다.
드럼 학원을 등록하며 가장 우려했던 건, 잦은 야근으로 레슨을 정기적으로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안서 제출을 하루 앞둔 2월의 어느 화요일, 오후 4시까지만 해도 나는 레슨을 취소할 생각이 없었다. 제안서는 마무리단계에 있었고, 인쇄소에 제본을 맡기고 바로 학원으로 달려가면 얼추 턱걸이로 도착하겠거니, 희망을 가졌다.
미리 얘기하자면 이 회사에 들어오고 뭐 하나 계획대로 흘러간 적은 거의 없다. 내가 제안서를 다 쓰면 뭐 하겠는가. 검토도 받아야 하고, 수정도 해야 하는 걸. 수정을 마무리하고 USB에 자료를 담자 이미 저녁 7시를 넘겼다.대표와 가방을 챙기는 사이 드럼 선생님께 문자를 보낸다.
선생님, OO입니다. 죄송한데 회사에 일이 생겨서 오늘 레슨을 못 갈 것 같아요.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부득이 문자 먼저 남깁니다. 가능한 내일 연습하러 가겠습니다. 죄송해요!
늦은 저녁 인쇄소는 붐비진 않았지만, 바로 우리 차례가 오지도 않았다. 시계는 7시 30분을 가리켰다. 드럼 선생님한테선 답장이 없다. 혹시 문자를 못 보셨을까 봐 전화를 건다.
선생님, 죄송한데 오늘 레슨을 못 갈 것 같아요. 네네, 회사에 일이 생겨서요. 내일 연습이라도 하러 갈게요.
야근이야? 고생이네. 내일 와. 레슨 해줄게. 시간 비어.
전화를 끊는다. 대표가 묻는다. 뭐 레슨 받아? 아, 그렇구나. 우리 회사에 악기 배우는 사람들 좀 있는데, 사내 밴드라도 하면 좋겠다.
대표 들으라고 옆에서 전화를 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내가 회사일 때문에 개인의 삶을 일부 희생했다는 것, 그리고 나는 매주 화요일 드럼 레슨을 간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얼떨결에 전달했다. 인쇄소에서 나오니 8시가 조금 넘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은 정말 드럼을 치고 싶은 날이었지만, 내일을 기약하며. 졌지만 잘 싸웠다.
다음 날 오전, 따끈따끈한 제안서를 제출했다. 2월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화요일에 야근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