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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굴절

동의이음어, 불안과 설렘

by 책꽃 BookFlower

어린 시절, ‘굴절’에 관한 과학 실험이 기억난다. 물속에 넣은 연필이 꺾여 보이는 이유는, 빛이 수면의 경계를 지나며 방향을 바꾸기 때문이다. 내 감정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내 생각의 경계들을 통과하면서, 본래의 감정은 다른 얼굴로 굴절되어 내게 도착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언제나 먼저 신호를 보낸다.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전구에서 ‘찌이잉’ 하는 소리가 자꾸 들린다. 귀에 심장이 달린 듯 ‘두근두근’ 소리가 울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 순식간에 몇 시간이 휙 지나가 있다. 나는 그때 알아챈다. 불안이라는 손님이 다시 찾아왔다는 걸. 오랜 친구처럼 낯익은 얼굴이지만, 반가운 손님은 아니다.


불안은 언제나 내 인생의 키워드였다. 나는 그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정말 많은 공부를 했다. 심리학, 철학, 자기계발서까지, 불안이라는 감정을 해부하듯 파고들었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책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었다.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라는 명문장으로 유명한 책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결국 ‘사랑받고 싶은 욕망’, ‘성공하고 싶은 욕망’,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이 클수록 불안도 커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책 전체에 온전히 공감하긴 어려웠다. 나는 욕망이 크지 않아도, 작은 일 하나에도 충분히 불안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욕망이 크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가 언제 불안을 느끼는지, 어떤 순간에 신체 반응이 먼저 오는지, 불안의 전조 증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해보았다. 그리고 불안을 느낄 때 도움이 되는 행동들의 리스트도 만들었다. 손글씨 쓰기, 산책하기, 좋아하는 문구 사기 같은 일들.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불안을 관찰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무소유’ 논란 이후 한동안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졌던 한 스님의 하루 일력에서, 마치 나를 위해 남겨둔 것 같은 문장을 만났다. 짧지만 마음을 울리는 한 줄이었다. 그 문장은, 내가 그동안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었는지를 조용히 끌어안아 주었다. 불안을 없애는 게 아니라,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그 말. 내가 읽은 어떤 책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불안한 느낌이 들면 ‘아, 불안한 느낌이라는 손님이 찾아왔구나’ 하고 넘어가세요.

그 느낌을 붙잡고 ‘난 불안한 사람’이라 정의하면, 손님이 아예 주인 행세를 하게 됩니다.”


순간 깨달았다. 나는 불안을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맞이하며 살고 있었구나. 그저 잠시 머물다 갈 감정일 뿐인데도. 그날 이후, 불안이 찾아오면 나는 ‘아, 또 그 손님이 오셨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만 해도, 신기하게 시간이 지나면 불안은 사라진다. 물론, 마음 다스림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순간도 많다. 하지만 가능한 순간이 더 많다. 불안은 내가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큰일’이라 여기면 커지고, ‘그저 지나가는 감정’이라 여길 때는 조용히 지나간다.


오늘도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들을 마주하며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는 내 마음의 굴절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다시 들여다본다. 이 불안은 설렘일지도, 이 긴장은 성장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불안하지만, 그 감정을 다르게 해석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한다.

“오, 설레는데.”

감사와 긍정의 마음을 품고, 굴절된 마음 위로, 조금 더 곧은 시선을 얹어본다.


먹구름이 파란 하늘을 가리더라도, 그 위에는 여전히 파란 하늘이 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 하늘을 떠올리며 행복할 수 있다.”

마음에도 날씨가 있다면, 오늘의 불안 역시 잠시 머무는 먹구름일 것이다. 그 위에는 여전히 나의 본모습, 나의 파란 하늘이 있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흐린 마음 속에서도 잠시 고개를 들어, 그 파란 하늘을 떠올려본다. 인생에는 여전히 많은 굴절이 남아 있다. 어떤 일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모양으로 왜곡되어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며, 모든 감정에는 ‘진짜 얼굴’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본다. 아주 보통의 하루를 위해.


아.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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