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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지만,
나도 아직 자라는 중입니다

딸아이를 키우며, 어린 나를 만났다

by 책꽃 BookFlower

나의 인생 드라마는 <나의 아저씨>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처음 본 날, 나는 밤새 울고 웃었다. 슬프고도 따뜻한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도 줄거리보다 먼저 내 안을 건드린 건,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이지안'. 그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자꾸 내 안에서 무언가를 두드렸다. 슬퍼도 울지 않고, 아파도 말하지 않고, 외로워도 혼자인 척하던 그 아이.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오래 전의 또 다른 아이 하나가 떠올랐다.


내 이름은 '꼭지', 별명은 '수도꼭지'


일곱 살까지 집에서 부르던 내 이름은 ‘꼭지’였다. 딸 둘을 키우는 집에서 아들을 바랐던 부모님의 염원이 담긴 이름. ‘딸은 이제 끝’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나는 자주 울어서 ‘수도꼭지’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그 별명이 너무 싫었지만, 다들 내가 울 때마다 놀리기 바빴다. 울 때마다 더 크게 놀리고, 나를 혼내는 어른들 틈에서 나는 점점 울지 않는 연습을 했다. 어린 시절 사진은 죄다 입 꾹 다문 울상뿐이었다. 사소한 말에도 금세 울컥하는, 감정이 풍부한 아이. 하지만 그 감정은 ‘예민함’이라는 말에 덧씌워졌고, 결국 나는 감정을 숨기고 사는 법을 배웠다. 말하면 불편해지고, 울면 귀찮아지니까. 그렇게 눈치 많이 보는 조용한 아이로 자랐다.


딸아이에게서 만난, 내 안의 아이


시간이 흘러 나는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딸아이를 보며 자주 울컥했다. 감정에 섬세한 아이. 속상한 일이 있으면 바로 우는 아이. 나는 그 모습에 괜히 화가 났다.

“왜 울어! 이게 울 일이야? 울지 말고, 하고 싶은 말 똑바로 해!”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딸아이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말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화가 나 있었던 거다. 딸아이의 눈물 속에서, 나는 위로받지 못했던 ‘수도꼭지’ 시절의 나를 보았다.


남편에게 화가 난 이유


딸이 울면 남편은 달래지도 않고 곧장 짜증을 냈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더 화가 났다. 내가 아이 편을 들며 아이를 나약하게 키운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서운했다. 그래서 아이를 훈육할 때마다 모른 척하며 넘어가려니, 남편이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화가 난 지점에 내 결핍이 있었던 것이겠지.

“애 기 좀 죽이지 말고, 사랑한다는 느낌을 먼저 주면 안 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응원해 주는 것뿐이야.”

내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고서야 깨달았다. 그건 내가 어릴 적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위로와 지지의 말들. 나는 지금 딸아이에게 말하면서, 동시에 어린 나에게도 말하고 있었다.


두 아이를 함께 키우는 일 - 육아는 정신 수양의 길


엄마가 된다는 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인 줄만 알았다. 작은 생명을 품고, 보호하고, 이끄는 일.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그 누군가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딸이 울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났다. 참았던 감정, 삼켰던 말, 억눌렀던 눈물들. 아이의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나의 서러운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그래서 육아는 ‘정신 수양’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절대, 아이만 키우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딸아이를 키우며, 동시에 내 안의 아이도 함께 키우고 있었다.

“울어도 괜찮아. 하지만 울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해줘.”

“너를 믿어. 그리고 언제나 응원해.”

그 말은 딸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언제나 이해받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나는 지금, 같은 말을 건네고 있는 중이다.


내력이 센,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의 아저씨>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힘들 때마다 자주 떠올리는 대사가 있다.
“인생도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나는 그 ‘내력’을 이제야 제대로 키우고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때로는 달리면서 딸아이에게 다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는 동안, 내 안의 아이에게도 조금씩 너그러워졌다. 나는 어느새 두 아이를 함께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이를 먹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아이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딸아이를 키우며, 나는 오래 전의 나를 만났다. 엄마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진짜로 ‘나’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아이와 내 안의 아이를 함께 키우며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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