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쓰기의 말들>을 읽고
글을 쓴다는 건 늘 어렵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서고, 더 좋은 문장을 찾느라 망설이다 결국 한 줄도 적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내게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이 전해준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분명했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발 디딘 삶에 근거해서 한 줄씩 쓰면 된다. 글쓰기는 만인에게 공평하다.”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그 손으로 다른 것을 잡을 수 있다.”
저자는 제때 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 글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글을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나 역시 그랬다. 온전한 글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글들. 생각의 흐름대로 쏟아낸 감정 쓰레기통 같은 글들이었다. 하지만 그 글쓰기가 나를 버티게 했다. 나는 나만의 속도로 감정을 적당히 풀어내며 불안을 달랬다. 일기도 아니고, 세상에 드러낼 만한 글도 아니었지만, 노트 속에 꽁꽁 숨겨둔 그 문장들은 내 마음의 환기구였다. 불안을 직접 끌어안기보다는 글로 빗겨 쓰면서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독서가 먼저였는지, 글쓰기가 먼저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책을 읽을수록 쓰고 싶은 욕망이 커진 것은 확실하다. 매일 생각을 정리하려고 책의 문장을 인용하고, 마음을 움직인 문장을 필사하며 짧은 글을 남겼다. 은유 작가가 “다독가라기보다는 문장 수집가로, 서사보다 문장을 탐했다.”라고 쓴 대목에서 나는 반가운 동질감을 느꼈다. 나 또한 이야기 전체보다 내 마음에 꼭 맞는 멋진 문장 한 줄이 더 좋았다. 매일 책을 펼치는 이유는 화두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오늘의 나를 비추어 줄 문장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작가는 글의 성패가 화려한 요소가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요소가 얼마나 적은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다이어트가 좋은 것을 먹는 것보다 나쁜 것을 줄이는 게 중요하듯, 글도 덜어내야 선명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나를 뜨끔하게 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늘 뭔가를 더 보태려 애썼다. 더 멋진 표현, 더 근사한 수식어. 그러나 오히려 그것들이 글을 무겁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글쓰기란 비워내며 본질을 남기는 작업이라는 걸, 은유 작가의 말이 일깨워주었다.
김훈 작가는 ‘필일오(必日五)’, 즉 원고지 다섯 장을 매일 쓰는 습관을 지켰고, 은유 작가도 아침밥 다섯 숟가락과 원고지 다섯 장을 꾸준히 쓰는 ‘필일오’를 실천한다고 했다. 나는 그 대목을 읽으며 ‘필일십오(必日十五)’라고 적어 보았다. 매일 최소한 15분은 책을 읽고, 15분은 글을 쓰겠다는 다짐이었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삶 속에서 꾸준히 지켜낼 수 있는 약속을 나와 맺고 싶었다.
은유 작가는 글을 ‘자기 고백’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일’로 확장한다. 내가 읽으며 위로받았던 문장들은 사실 다른 이의 슬픔과 불안을 적어낸 글이었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자기 구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슬픔과 불안의 글이, 때로는 또 다른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된다. 내 불안을 드러낸 문장이,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는 그렇게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다리다. 삶이 불완전한데, 글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불안이 스며든 문장은 더 진실하다. 나는 이제 서툰 문장이라도 기꺼이 남긴다. 자기 과시나 험담이 아니라 솔직함에서 나온 글이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쓰기의 말들>은 단순한 글쓰기 지침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살아내는 법, 고통을 해석하는 법, 타인과 연결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살아낸다는 뜻이고, 살아낸다는 건 곧 쓰는 일이다, 글쓰기는 나를 불안에서 건져냈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길을 찾아 주었다. 달리기가 몸을 단련하듯, 글쓰기는 마음을 단단하게 한다.
“써야 알고, 알아야 나아지고, 나아지면 좋아지고, 좋아지면 안심한다.”
이 문장이 내가 지금 글을 쓰는 이유이고, 앞으로도 계속 써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