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적동 봄을 그리다(8)
동식물을 인간의 입장에서는 키운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이기적 억지일 뿐이다.
거위병아리 세 마리를 지난해 무안전통시장에서 구입해 키워왔는데 그동안 두 마리가 죽고 하나만 남았다. 별생각 없이 닭장에서 거위도 함께 키우면 되겠지라고 여기고 사 왔는데 그것은 나의 오판이었다. 한동안 거위들은 닭들과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병아리를 데리고 온후 병아리들을 극심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몇 마리의 병아리가 죽게 되었고 거위들은 닭들이 놀던 방목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한동안 잘 지내며 몸이 커진 거위들은 울타리가 낮은 빈팀을 넘어 자유를 찾아 나갔다. 거위들의 자유를 향한 탈출이 이어지던 며칠 후 도시에서 키우다 우리 집 주변에 버려진 유기고양이에게 한 마리가 살을 뜯겨 죽고 말았다.
다시 임시방편으로 헌 나무파렛트로 좁은 임시 거처를 만들어 가두었다. 시간이 없어 지붕까지는 만들지 못했는데 유기고양이의 살기 위한 거위 공격으로 다시 한 마리의 거위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번에는 수컷이 희생되고 말았다. 암컷을 지키기 위해 유기고양이와 사투를 벌였을 것이 틀림없다.
시골 산에 사는 야생고양이들은 산과 들에서 쥐 나 개구리 새들을 사냥하기에 가축에는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들은 버려지는 순간 민가로와 음식물쓰레기통을 뒤지거나 닭과 같은 작은 가축을 잡아먹기 위해 혈안이 된다. 집고양이는 사냥능력을 상실했고 사람과 함께 사람이 먹어왔던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거위를 죽인 유기고양이는 신고를 통해 유기동물보호소로 갔고 남은 거위는 나무파렛트로 만든 간이 거처에 지붕을 대충 덮어 몇 달을 버텼다. 거위를 키울 의지가 거의 상실되었다.
그러다 봄이 되면서 홀로 남은 거위가 알을 낳기 시작했다. 내가 책임지겠다 들여온 식구인데 어찌하건 이 녀석이 사는 동안 내가 나름 제공 가능한 거위의 별도 집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거위가 놀 둠범이나 연못이 있다면 최고지만 거기까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도 나름 여유 있게 돌아다니며 지낼 수 있는 거위집을 튼튼하게 짓고 있다. 집을 짓고 녀석이 외롭지 않도록 다시 두 마리를 더 사 올 계획이다.
키운다는 인간의 언어는 엄밀하게 따진다면 가두고 제한하며 통제하는 것으로 가축의 입장에서는 억압적이며 폭력적인 개념이다. 오로지 인간의 입장에서만 키운다는 개념이 가능하며 그것은 일종의 속임수와도 같다. 우리는 거위를 비롯해 가축을 키울 수 없다. 단지 인간을 위해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으로 하나다. 오로지 사람만이 삶과 죽음을 나누어 생각한다. 사람은 살기 위해 죽음을 외면한다. 그런다 하여 삶과 죽음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