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는 참을성이 대단하시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참을 수 있지 싶을 때가 많았다. 원래 내성적인데다 그런 환경에서 살다보니 나는 감정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살았다. 나는 늘 “괜찮아” 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 살았다. 실제로는 하나도 괜찮지 않은 적이 태반이었다. 습관처럼 내뱉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다는 걸 숨기기 위해 하는 말일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화가 났을 때도, 서운할 때도, 울고 싶은 때조차 나는 “괜찮아”라고 말했다.
왜일까? 안 괜찮은데 왜 괜찮다고 말했을까?
어려서부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렀다. 대가족이 살다보니 어른도 아이들도 많았다. 아이들의 감정이 존중받지 못하던 시절이라 감정을 표현하면 철없다고 혼나기 일쑤였다. 다른 형제들이 혼나는 걸 보면 나는 알아서 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소위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내 스스로는 착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늘 착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심지어 친구들에게도. 그 말을 들었을 때 편안하거나 기분이 좋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때부터 나는 내 감정은 표현하면 안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늘 일만 했다. 밤에 잘 때도 엄마와 잔 기억이 없다. 오히려 아버지가 세심하게 잘 챙겨주었다. 밤에 잘 때 동생과 나는 늘 아버지를 쟁취하려고 아버지의 양쪽에서 귀여운 전쟁을 하였다. 엄마와 아버지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엄마의 일중독은 80대 중반 허리를 못 쓰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사업에 망하면서 몇 년 동안 다정하지 않은 아버지로 변했다. 그 실패가 아버지를 많이 괴롭혔던 것 같다. 이후 다시 다정한 아버지로 돌아왔지만 나는 이미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회복하지 못했다.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탓일까. 내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건 류마티스관절염을 앓으면서부터였다. 그 명은 나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었지만 관계의 민낯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었다.
이혼한 친구의 홀로 남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사흘간 장례식장을 지켰다. 외롭고 힘들 그 시간을 함께해주고 싶었고, 그렇게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런 식으로 챙겨 주었다. 그것을 굉장히 고마워하면서 이 다음에 내가 늙어 아프면 자기가 내 병수발을 다 들어줄 거라고 말했던 친구였다.
류마티스관절염 급성으로 온 데다가 당시 메르스라는 전염병이 유행하던 때라 대학병원 초진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고, 동네병원 약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아 온몸의 작은 관절이 다 부어 몸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었다. 걸음걸이만 봐도 건강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나를 본 친구는 눈길을 피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나 위로가 아닌, 실망을 내게 주었다.
그 순간, ‘이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니 이렇게 나를 홀대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문이 철커덩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프면 자기가 돌보겠다던 친구는 어디 갔나? 그랬던 친구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동안 이 친구에게 받았던 돌봄은 거짓 돌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건강하고 유용할 때만 존재하는 돌봄, 내가 먼저 베풀었을 때만 돌아오는 돌봄이었다. 진짜 돌봄은 다르다. 내가 아파도, 쓸모없어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도 여전히 베푸는 것이 진짜 돌봄이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이전처럼 늘 수용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그러다가 조그만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갈등을 풀고 싶은 마음도 다시 그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얼마 후에 화해의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친구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조금도 미련도 남지 않았다. 나에게 해로운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거짓 돌봄을 거부하는 것 역시 자기돌봄 중 하나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나의 대인관계 방식은 크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내 일이 늘 뒷전이었고,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필요를 먼저 챙겼지만, 이제는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과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겼고, 어떤 관계는 단절되었다. 딱 한 사람, 95세의 친정엄마만은 예외였다. 고관절 골절 사고가 2~3년간 세 번이나 일어났고 수술과 재활 후 회복하여 혼자 지내시는 엄마의 삶을 잘 알기에, 나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었다. 엄마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복잡하지만, 그 감정이 엄마를 케어하는 일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엄마의 돌봄을 통해서, 서운하고 화가 나는 감정은 인정하되, 그것이 돌봄 행위를 방해하지 않는 성숙한 돌봄의 형태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관계가 다 똑같지는 않으므로.
브레네 브라운은 『마음 가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취약함(Vulnerability)은 감정적 노출, 불확실성,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그리고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용기의 핵심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말을 몰랐고, 설령 들었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었고, 무방비한 상태로 보이는 것이 부끄럽고 위험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아플 때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나 자신을 감추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괜찮아’는 나를 지켜주는 말이 아니라, 나를 고립시키는 말이었다. 서운하고 화가 나도, 아프고 슬퍼도 말하지 못하고 삼켰던 감정들, 그 감정들이 쌓이고 응어리져서 결국 나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때로는 나 자신과도 단절시켰다.
브레네 브라운은 또 이렇게 말한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방어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진짜 연결의 시작이다.”
이 말에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 건, 아프고 무너진 내 모습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때였다.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망가진 외모, 병든 몸, 몇 년을 삼켜버린 무기력. 이 모든 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더니 놀랍게도 등을 돌리기보다는 곁에 머물러 주는 친구가 생겼다. 내가 마음을 연 만큼 내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과, 내가 감정을 표현한 만큼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들이 있어서 나는 지금 외롭지 않다. 그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삶이 고맙다.
이제 누군가 내게 “괜찮아?”라고 물으면, 나는 정말 솔직하게 대답한다.
“아니야, 괜찮지 않아. 요즘 이런저런 일로 힘들어.”
“몸이 아파서 우울해.”
“네가 그런 말 해서 서운했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무척 어색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돌보는 방법이고, 진정한 관계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에 애써 용기 내어 솔직하게 말하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내 감정에 정직하고, 내 한계에 정직하고, 내 필요에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착한 사람에서 정직한 사람으로’ 이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선물한 가장 큰 돌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