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열 살 때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사업에 망하시고 매일 술을 마셨다. 보다 못한 엄마는 보따리 장사를 나섰다. 매일 밤 엄마를 기다리다 엄마가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잠든 날이 부지기수였다.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1970년대 당시 여자들의 사회생활이 거의 없던 때라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생활력 강한 엄마는 자식 넷을 먹이고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고 하나라도 더 팔겠다고 밤늦게까지 보따리를 이고 돌아다녔다.
그해 막내 작은아버지가 결혼을 했다. 집안에서 적어도 한 명은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집안을 일으킨다는 신념으로 아버지는 막내 작은아버지를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그 작은아버지는 음악선생님과 결혼을 했고 결혼할 때 피아노를 가지고 왔다. 엄마와 작은엄마의 두 여자의 인생이 어린 나의 눈에 극명하게 대비되어 비쳤다. 같은 집안 며느리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그것은 교육의 격차였다. 그때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을 나와서 근사한 직장에 들어가야겠구나. 그래야 어떤 일이 생기든 비참하게 사는 것을 피할 수 있겠구나 하는 다짐을 했다.
엄마가 불쌍해서 무슨 일이든 도와야겠다는 생각에서 식구들의 저녁밥을 내가 챙겼다. 형제 중에 딸이 나 밖에 없기도 했지만, 이 일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될 줄 몰랐다. 처음에는 어린애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칭찬을 했지만, 어느새 그건 당연히 나의 일이 되었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나는 돌봄 제공자가 되었다. 엄마를 돌보고, 가족을 돌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내 역할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어린 나를 돌봐주는 사람을 없었다. 엄마는 장사하느라 여유가 없었고, 아버지는 그동안 승승장구하다가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해서인지 매일 술을 마시면서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내가 고1때까지 살아계셨기 때문에 더욱더 저녁밥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방과 후에 도서관에 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버지는 하는 일마다 계속 실패해서 나중에는 엄마의 장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엄마의 장사 아이템은 음식으로 바뀌었다. 시장에서 팔아야 할 음식을 집에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집안일은 더 많아졌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인데다 일찍 철이 들어 부모님에게 싫다는 소리를 못했다. 야단맞을 짓도 하지 않았다.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참으면서 내가 할 책임을 다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길어지다보니 식구들조차 나는 뭐든 잘하고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심지어 엄마조차도.
50대 중반에 류마티스관절염에 걸렸다. 급성으로 온데다 메르스가 유행하던 때라 초진이 계속 연기되고 있었다. 통증 때문에 밤새 잠을 못 이루는 날이 허다했다. 손가락 발가락 변형도 약간 왔다. 진료가 시작되고 병원에서 주는 약을 복용하면서 통증이 줄어들었고 밤에도 통증 때문에 잠을 못자는 일은 없어졌다. 내가 앓아보니 류마티스관절염은 공주병이다. 공주처럼 편하게 살면 안 아픈데, 힘든 일을 하면 바로 몸에서 신호가 온다. 이 신호는 ‘이제는 너 자신을 돌보라’는,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였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즈음 친정엄마는 큰 수술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병간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가장 많이 주어졌다. 며느리가 셋이나 있지만 아예 안하는 며느리는 빼고, 집이 멀어서 못하는 며느리를 빼고 나니, 큰올케와 나만 남았다. 나의 병은 고려대상이 되지도 않나보다. 이때부터 나의 불만은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말로 표현하지도 못했다. 엄마도 수술 후 회복해서 얼마간 잘 생활하다가 또 문제가 생겨 수술하고 회복하고, 이런 시간이 5~6년 지속되다보니 드디어 나의 분노가 폭발했다. 누구와도 부딪히는 것이 싫어서 늘 내가 양보하고 희생했더니 나를 뭘로 보고 이따위야 하는 생각이 솟구쳤다. 그렇다고 싸우지도 못한다. 그저 상대를 안 할 뿐이다. 하지만 나도 아픈 몸을 가지고 있는데, 내 돌봄 필요는 고려되지 않고, 돌봄은 항상 나에게서 남으로만 흘러간다는 돌봄의 불공정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런 내가 너무 답답했다. 나는 왜 이럴까. 나의 심리상태와 그로 인한 행동을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코칭을 하면서도 심리학 공부가 필요함을 느꼈던 터라 정신과 의사선생님이 이끄는 심학원에 들어가서 6개월 동안 진행되는 기본코스와 1년 동안 진행되는 심화과정을 마쳤다. 공부하면서 나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나의 애착대상은 할머니와 아버지였다. 그 두 분을 10살 때 모두 잃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 일로 나는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더 말을 안 하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아이가 되었다. 10살에 내가 잃어버린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돌봄받을 권리, 보호받을 권리, 어린아이로 살 권리도 함께 잃어버렸다. 그 대신 내가 얻은 것은 돌봄 제공자라는 역할뿐이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해 공부하던 중 한 사례를 읽으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한 내담자가 바람핀 자신의 남편 때문에 우울증이 걸렸다. 잘못을 저지른 남편은 멀쩡한데, 잘못 없는 자신만 병까지 걸린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그때 융은 내담자에게 말했다.
“당신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은 잘못이요.”
아~ 이 이야기는 바로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정신이 확 차려졌다. 주변 사람을 나무라기에 앞서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을 했던 나에게 가장 큰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순간 나는 돌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얻었다. 나는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는 것’을 이기적인 행위라고 생각해왔다. 남을 먼저 돌보고, 나는 나중에. 아니, 나를 돌봄의 대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융은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대인관계 태도는 크게 변했다. 싫으면 싫은 티를 내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았다. 시댁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마음이 불편한 것이 싫어서 참았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았다. 내가 변하니 사람들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 함부로 하지도 못한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는데 이걸 이제야 알다니.
나를 먼저 돌보기 시작한 것, 내 감정을 인정하고, 내 한계를 인정하고, 내 필요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건강한 돌봄의 시작이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만 돌보는 것은 진정한 돌봄이 아니다. 그것은 돌봄의 이름을 빌린 자기희생이고, 결국에는 모두는 지치게 만드는 독성있는 돌봄이다. 진정한 돌봄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내가 먼저 건강하고 행복해야 남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돌볼 수 있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융의 말은 내 삶의 패턴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이제 나는 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챙겨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것을. 이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나를 잘 돌봐야 남도 잘 돌볼 수 있다는 것을.
10살 때 잃어버린 돌봄받을 권리를 60이 되어서야 되찾았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나를 제대로 돌보면서, 동시에 남도 건강하게 돌보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돌봄이고 지속가능한 사랑이다. 나를 먼저 챙기는 것이 모든 건강한 관계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