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지만, 사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정답이란 없다. 오직 자신만의 답안을 스스로 써 내려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 알프레드 아들러
열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보다 할머니와 유대가 더 깊었던 나는 상실감에 괴로웠다. 게다가 아버지는 사업이 망하면서 방황을 하셨다. 매일 술을 마셨고 나와 정서적으로 유대가 깊었던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보다 못해 엄마는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였다. 갑자기 집에 어른들이 없어졌고 어린 나는 뭄 둘 바를 몰랐다. 갑자기 내 눈에 집안일이 들어왔고 어린 동생을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열 살짜리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잔인했다. 이때부터 나는 나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남을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내 필요와 감정은 뒤로 미뤄둔 채, 가족을 돌보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열 살 아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돌봄과 보호,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아이로 살 권리를 잃어버렸다. 대신 내가 얻은 것은 ‘어른스럽다’, ‘의젓하다’는 칭찬뿐이었다.
그해, 막내 작은아버지가 음악 선생님과 결혼했다. 아버지는 막내 작은아버지가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원했다. “집안에서 한 명은 제대로 교육받아야 집안을 일으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작은엄마는 동화 속 공주님 같았다. 풍요로운 집에서 고생 없이 자란 티가 나는 그녀와, 거친 세상을 악착같이 살아가던 내 엄마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같은 집안 며느리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지?" 어린 나는 끊임없이 궁금했다. 결국 내가 찾아낸 답은 '교육'이었다. 그 순간 내 인생의 목표는 명확해졌다. “반드시 대학에 들어가 좋은 회사에 취직하자!” 그래야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엄마처럼 보따리 장사는 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이것도 나름의 자기돌봄이었다. 미래의 나를 보호하려는 방법이었다. 교육을 통해 결제적 자립을 이루고, 엄마처럼 힘든 삶을 살지 않으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지금 여기의’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을 놓쳤다.
서른에 대기업에 입사했으니 그 당시 기준으로는 한참 늦었고, 그 사이 많은 훈계를 들었지만 나는 요동하지 않았다. 내가 설정한 기준을 만족해야 나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회사 로고와 이름이 버스에 크게 새겨진 통근버스를 탔던 첫날, 나의 로망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동안 길에서 대기업 통근버스를 보면서, 반드시 저 버스를 타리라 다짐했던 나였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뿌듯함을 만끽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뿌듯함은 옅어졌다. 입사 후 성공했다는 성취감을 만끽했지만 그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인생은 때때로 장난기 가득한 아이처럼 나를 놀렸다. 입사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결혼을 했고, 곧바로 육아와 가사, 거기에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까지 내 인생을 겹겹이 포위했다. “이건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닌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토요일에도 일하던 그 시절, 오롯이 내 시간을 갖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시 나는 돌봄 제공자의 역할로 내몰렸다. 회사에서는 일을 잘하는 사람, 집에서는 좋은 며느리, 좋은 엄마, 좋은 아내. 그 모든 역할 속에서 정작 나 자신은 어디에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원하고, 어떤 사람인가?
인생의 성공을 ‘무엇이 되는가’로 설정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나는 ‘성공’을 특정한 직장, 직위, 또는 사회적 성취와 동일시했다. 대기업에 들어가서 좋은 직책을 얻고, 남들에게 인정받으면 행복과 성공이 뒤따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이루어진 성공이 나에게 안겨준 행복은 생각보다 빨리 식어버렸고, 그래서 허망했다. 외적 성취에만 집중한 나머지, 정작 내 마음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기타가와 야스시는 그의 책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아주 오래된 가르침』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공을 위해서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다. 진정한 성공과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한 가치와 방향성, 즉 ‘내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고 그런 삶을 살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엇’을 이루어야 행복과 성공이 따라온다고 믿었던 나의 신념을 버렸다. 내가 가치있다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고민하며 많은 씨름을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말하기보다는 듣는 편이었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경청 훈련이 저절로 이루어졌던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코칭을 접했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첫눈에 반했다."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끌어내는 일이란 내게 꼭 맞는 옷을 찾은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코칭을 하며 살아도 좋을 만큼 코칭이 좋았다.
코치는 내담자가 가지고 온 문제를 본인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내담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코치의 질문을 통해 내담자는 성찰을 하며 의식이 확장되고 성장하게 됨으로써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던지는 작은 질문 하나로, 내담자의 문제가 풀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짐으로써 삶이 새롭게 빛을 발할 때의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런 일이었다. 내가 꿈꿨던 인생은 ‘대기업 입사’가 아니라,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과정에 있었다. 누군가가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새롭게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인생 후반부의 나에게 주어진 뜻밖의 선물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타인을 돌보는 이 새로운 방식이 나 자신도 치유해준다는 것이었다. 내담자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해갈 때 나도 함께 나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들러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열등감을 갖고 살아가지만, 그 열등감이야말로 인생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는 "인생의 의미는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며, "인생의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온전히 살면서 미래를 스스로 선택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과거의 상처나 경험이 나의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말이다. 얼마나 희망적인가.
아들러 심리학은 내게 "타인의 기대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르쳐 주었다. 또한 인간관계에서도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오랜 시간 희생과 의무에 갇혀 수직적이고 억압적인 관계를 경험하며 살았다. 아들러의 말처럼, 진정한 행복은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인생의 답안지를 다시 쓰기로 했다. 이번에는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진짜 꿈을 위해서 말이다. 새로운 답안지에는 이런 것들이 적혀 있다. 나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돌보는 것.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찾아서 그것에 집중하는 것. 타인을 돌보되 나 자신도 함께 돌보는 균형잡힌 관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의 상처나 남의 기대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 여기서 내가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것.
코칭을 통해 나는 돌봄의 새로운 형태를 발견했다.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돌봄이 아니라, 서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돌봄,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도록 격려하는 돌봄.
내 인생의 답안지 위에 내 손으로 진짜 행복을 써 내려가고 있다. 그 행복의 중심에는 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는 자기돌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