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속도, 나만의 방향으로 일하기
어렸을 때 정글짐을 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정글짐에서는 다양한 방향과 경로를 탐색하며 자유롭게 오를 수 있다.
친구와 함께라면 더욱 즐거운 놀이가 된다.
메타(전 페이스북) 최고 운영책임자인 셰릴 샌드버그는 2013년에 출간한 <린인(Lean In)>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사다리가 아니라 정글짐을 오른다’고 말했다.
“사다리에서는 정상에 오르는 길이 하나뿐이지만 정글짐에서는 여럿이다. 정글짐 모델은 누구에게나 유익하지만, 특히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거나, 도중에 다른 길을 걸으려고 하거나, 외부의 장애물에 의해 길이 가로막혔거나, 얼마 동안 쉬었다가 노동시장에 재진입하려는 여성에게 더욱 유익하다. (중략) 게다가 정글짐은 정상에 오른 사람뿐만 아니라 다양한 단계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멋진 광경을 선사한다.(p.88)”
'경력 정글짐'은 포춘지(Fortune magazine)의 편집자인 패티 셀러스가 썼던 은유인데 기존의 ‘경력 사다리’의 대안적 개념이라고 한다.
일터 여성들의 사례를 연구한 결과들은 경력 정글짐의 가능성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 처음부터 경력 정글짐을 염두하고 연구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게 여성들에게서 발견된 여러 특징들이 경력 정글짐 개념에 딱 들어맞았다. 이런 특징들은 여성을 통해 발견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일하는 부모들에게 확장, 적용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사다리에 오르는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에 열등성을 부여해온 건 자본주의적 가치들이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엄마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오르려니 최선을 다해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를 평가하는 권한자들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최선을 다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절대적인 결과로만 얘기해야 한다. 이런 기업 조직의 태생적 속성 때문에 마미트랙은 느리고 완만해서 열등한 경력의 경로로 치부되어 버렸다.
이런 현실에서 정글짐의 모티브는 엄마들로 하여금 각자 처한 상황에 맞춰 자신만의 방향과 속도로 경력을 키워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설명하고 희망을 제공한다.
사실 한 개인이 경력을 구성하는데 정답은 없지 않은가?
이제 고용방식과 근로형태가 점차 다양해지고 직업의 세계도 다변화가 예측되는 상황이기에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일의 방식들이 점차 존중받는 사회가 될 것이다.
사다리와 달리 정글짐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오를 수 있는 경력의 과정을 잘 묘사한다. 정글짐은 직선으로 단숨에 올라갈 수도 있지만 우회할 수도 있고 오르락내리락할 수도 있다. 일하는 부모들의 경우, 어떤 시기에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더 적극적으로 일하지 못할 것이고, 어떤 시기에는 일과 학업까지 병행하며 경력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기꺼이 일의 방식과 속도를 통제하고 변경할 수 있으면 된다. 빨리 먼저 도착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정글짐을 탈 때는 위만 보지 않고 주위를 살피며 간다. 경력 사다리의 개념이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반면 경력 정글짐은 의미 있는 타자들과의 관계들이 고려된다.
우선, 정글짐의 중턱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과 비슷하게 정글짐을 타는 다른 동료, 후배들을 볼 수 있다. 이들과 함께 정글짐을 오를 전략을 상의하고 노하우를 공유할 수도 있다. 후배들이 좀 더 편하게 정글짐을 오를 수 있도록 부당함과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인터뷰했던 많은 일터 여성들은 경력이 정체되거나 단절되는 경험들, 경력의 정글짐에서 오르막과 내리막을 넘나드는 과정을 겪으며 어느 정도의 위치에 도달했을 때, ‘여성’으로서의 책임과 사명감을 느끼며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차별적인 관행이나 제도를 없앤다거나, 남자 후배들의 육아휴직을 지지해주고, 유연하게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이렇게 경력 정글짐은 함께 오르내린다는 공감대 속에서 더불어 누리는 경력의 과정을 보여준다.
경력의 정글짐을 오르는 과정에는 가족도 함께 한다. 요즘,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했던 가족 중심성은 개인주의와 충돌하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여성에게 가족은 개인의 경력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지목되어 왔다. 경력 사다리 패러다임에서라면 가족 때문에 여성의 삶이 더욱 무겁고 바빠지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자녀의 유무는 삶을 180도 바꿔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 육아는 삶의 스팩트럼을 넓힌다. 경력의 정글짐에서 멈칫하는 시간, 정체와 내리막이 있을지라도 이 구간은 '낭비'적이지 않다. 더 깊이 일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탐색하고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더욱 분명히 다질 수 있게 된다.
또한, 각자의 경력 정글짐을 오르내리는 가족 간의 관계성은 서로의 경력개발을 돕는 자원이 될 수 있다. 특히 부부간에는 각자가 경력의 내리막과 오르막, 정체와 도전 과정에서 서로 조력하며 팀워크를 발휘할 수 있다. 정글짐의 정상에서 얻는 성취 결과는 서로 물리적, 정서적으로 지지해주고 이해와 응원을 제공한 가족과 함께 나누고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결혼하지 말고 커리어에 집중하면 좋겠다고 조언하는 인터뷰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육체적, 물리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지만 ‘왜 일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해요?’라는 반문, 에너지의 충전지가 가정이라는 고백들은 가족이 또 다른 차원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덧붙여주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경력의 정글짐은 일하는 엄마들만을 위한 모델은 아니다. 경력의 역동성이 커지는 시대에 점점 많은 사람들의 일을 설명하는 은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일과 가정생활 병행으로 갈림길에 서있는 (대부분 여성일) 당사자들에게
지금의 정체, 단절, 혹은 후퇴가 '끝'이 아니라 '다른 길'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랑스럽고 고마운 개념이다.
더 적극적으로 일에 열중하고 Lean in 해야 한다는 가혹한 부담에 비해
정글짐에서 우리는 매 순간을 더 즐기고 감상할 수 있으며 뒤 쫓아오는 무리를 의식하지 않고 내 속도대로 나아갈 수 있다. 나만의 속도, 나만의 방향으로 정글짐에서 이제는 lean in and out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