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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한승 Aug 22. 2024

[소설쓰기 #1] 북한산 괴물과 돌림노래

요즘 맨날 일기 쓰고 시 쓰다 보니 정작 소설을 안 쓴다.

그래서 마음먹은 건 단편 소설을 하나 시작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대충 끊어 올리기. 누구나 그렇듯 마감이 있어야 열심히 쓰게 된다. 블로그는 시험기간에 죽치러 가는 대학가 카페 같아... 아무도 날 신경 안 쓰는데 그래도 누군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마음에 한 번씩 괜히 허리를 곧추세우는...?



#1

우진과의 점심은 보통 순대 국밥 아니면 해장국. 가끔은 이름 없는 잔치국숫집엘 간다. 금요일 밤엔 항상 과음을 하는지 우진은 이런 종류를 자주 찾았다. 나는 아, 오늘은 날이 조금 더운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렴 즐거운 마음으로 우진 뒤를 쫄래쫄래 따라간다.

광화문역에서 오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가게 구석 자리에 단둘이 앉는다. 우진은 항상 그렇듯 펄펄 끓는 빨간색 국물의 무언가를 조금씩 떠먹고, 나는 곰탕의 하얀색 소면 덩어리들을 그 옆에서 가만히 뒤적인다.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까 어쩌면 지난 주말 갔다 온 전시회 얘길 꺼내볼까 머릿속을 굴리고 있는데, 우진이 무심히 말 한마디를 던진다. 귓속에 따사롭게 내려앉는다.

"선배, 시간 되면 이 영화 보세요. 주말에 봤는데 선배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말에 머리 위 달려 있던 투명색 토끼귀가 쫑긋하는 것 같다. 기다리던 택배 문자를 받은 것도 같다. 입 안 남아 있던 곰탕 국물이 요술처럼 달큼해진다.

"아 그래요? 저도 제목 들어만 봤는데, 그래야겠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젓가락 옆에 누워 있던 휴대폰을 깨워 CGV어플로 들어간다. 일요일… 여의도… 오후 아홉 시 반… 기세 좋게 영화 시간을 고르고 있는데 우진이 내 쪽으로 슬그머니 몸을 기울인다.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퍼진다.

"좋다 그거. 그때로 하세요 선배."

내가 우진을 짝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자그마한 오해다. 짝사랑은 이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마음. 뭐랄까, 들뜨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어쩔 줄 모르겠는 무서운 마음. 가슴 가득히 그 사람 생각을 부표처럼 안고 둥둥 떠있다가, 결국 제 무게 이기지 못하고 함께 침몰해 버리는 것. 우진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니고…… 그 앞에선 초등학생이 된 것 같다. 아직 햇빛 쌀쌀한 학기 초에 교실을 헤집고 다니다가, 같이 놀 친구를 끝끝내 찾아낸. 과묵한 우진은 그냥 가끔 나와 같은 영화를 좋아하고. 수업 끝나고 광화문역 돌아가는 길에 각자 먹을 과일 한 움큼을 함께 사기도 하고. 카페에선 나란히 앉아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구경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메타몽이 되게 하는 사람.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보라 색깔 껌딱지 같은 거. 이거 봐, 네가 좋다는 거 나도 했어. 다음엔 또 무얼 할까. 요즘은 뭐가 네 마음속을 잔뜩 채우고 있니. 나에게도 알려줘. 나는 우진을 자주 따라했다. 자전거 산책을 즐긴단 말에 여름밤 청바지 차림으로 자전거를 빌려 탔다가 땀에 흠뻑 젖었고. 비 내리는 겨울 저녁엔 그가 좋다고 했던 작은 서점을 찾아 안국역 옛 거리를 헤매었고. 시향도 없이 탬버린즈 향수를 샀다간 당근마켓에 금방 되팔았다. 모두 좋았다. 나도 해봤다고 말해줄 수 있어서.

어떻게 내가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여의도 CGV 한구석에 앉아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다짐했다. 자, 재미없어도 기어코 재밌는 부분을 찾는 거야. 그리고 그걸 꼬투리 삼아 통째로 재밌었다고 하자. 나도 너처럼 이 영화 너무 좋았다고 하자. 그 사이 영화는 금방 막을 올렸고, 그건 두 시간 이십 분 짜리였고, 꾸미거나 때 묻지 않은 일본 소년 두 명이 주인공으로 나왔으며… 상영 내내 무언가가 마음속으로 잔뜩 쏟아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위기의, 여름밤 한강 둔치 산책길같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영화. 우진 때문에 봤는데, 우진을 빼놓고서도 좋았다. 아니지, 더 정확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진이 아니었다면 자칫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좋은 사람은 이렇게 나를 새로운 곳으로 새로운 곳으로 이끈다.



퇴근할 무렵 쳐다보는 하늘에 주황색 노을이 비치기 시작한 구 월 첫 주의 금요일.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창문을 내다보던 중 허벅지께에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우진이었다. 마음이 일 센치 정도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메시지를 열었다.

‘선배, 저 내일 디자인 수업 못 갈 것 같아요. 대전 가야 할듯ㅠ’

갈비뼈 안쪽 어딘가가 조금 더 깊게 내려앉았다.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구나. 이 주일에 한 번, 그렇게 규칙적일 줄 알았던 너희들의 만남도 가끔 이렇게 예외를 만드는구나. 너네 둘, 아직 건재하구나. 짧은 생각을 멈추고 타박타박 화면을 눌러 알겠다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우진의 마지막 문자 밑에 회색 점 세 개가 나타나더니 춤을 추듯 일렁였다. 우진이 새로운 말을 덧붙이고 있었다. 나는 쓰다 만 답장을 지우고,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을 손가락을 상상하며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회색 점 세 개는 마음을 바꾼 듯 잠깐 사라졌다가, 곧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곧 검은색 대화창에 새롭고 짧은 파란색 문장 하나가 떴다.

‘대신 일요일에 같이 거기 가주면 안 돼요? 지난주에 선배가 말했던 거기.’

나는 잠깐 머리가 새하얘져서는 지난주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거긴 절대 갈 수 없다. 특히 우진과 함께는 더더욱. 북한산 밑 서늘한 곳에 자리 잡은 그곳엔, 틈틈이 날 잡아먹으려는 스물아홉 살 괴물이 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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