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로 튀어!
1989년, 아홉 살.
울산으로 이사를 가기 전에
나는 경기도 남양주 퇴계원 별내면에서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그곳은 유년기
도회지와 시골의 중간 지점으로 기억한다.
도시에서 유년기를 보낸 5살가량
많은 선배들이 경험하기 힘든 것을 체험했다.
나무가 깎인 산 중턱에서 메뚜기를
콩과 함께 구워 먹었다.
(아마도 아파트 공사를 위해 땅을 팠던 자리일 것이다)
늘 배가 고팠는데 지금 같은 겨울이면
땅 속에 묻힌 무를 뽑아서 이로
껍질을 대충 긁어낸 다음
입 안에서 씹으면 맵고 시원한 맛이 났다.
귤은 한 개 100원이었다.
"엄마, 100원만."으로
얻어낸 동전 하나로 귤 한 개를 먹었기에
아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귤 한 개를 사는 사람도 없지만
그때에 비해 귤 가격은 오르지 않은 것 같다.
국민학교 1학년은 어떤 공부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전 앨범을 꺼내보면
겨울 점퍼치곤 얇은 외투에
노란색 비닐 명찰에 내 이름이
적힌 입학 사진이 증거로 있지만
도무지 1학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진에 아버지는 없었다.
아버지는 전기기술자로 한창 공장을
짓는 당시 울산에 계셨다.
울산에서 전기 공사를 하느라고
수개월만에 한 번씩 아버지를
잠깐 보았는데 예비군 훈련인가,
민방위 훈련을 받으려고 잠시 올라왔을 때
새벽, 라면을 끓여먹고 나갔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는 자는 척했지만 부엌에서
풍겨오는 라면 냄새와 간간히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만 맡고 들을 수 있었다.
식구들과 수개월 간 떨어져 지낸 아버지가 머문
숙소에 어머니와 함께 따라간 적이 있었다.
내게 울산의 첫인상은 공장 굴뚝이었다.
여천동이라는 동네에 아버지는 단칸방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혼자 머물던 그 방에
세 명이 천장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
막 잠이 들려는 때, 여름도 아닌데 웬 벌레가 날아다녔다.
바퀴벌레.
끈을 두 번 당겨 형광등이 켜지고
아버지는 신문지를 돌돌 말아 커다랗게
살찐 바퀴벌레를 잡았다.
그리고 연탄보일러에 녀석은 들어갔는데
매퀘하게 탄 내가 진동을 했다.
다시 잠을 들기에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리고 남양주로 다시 돌아온 나는
시간이 좀 지나 겨울비가 내리는
울산으로 이사를 갔다.
공장 굴뚝, 온산병, 바퀴벌레로
내 첫인상을 구긴 공업도시가
10년 간 내 연고지가 되었다.
당시는 포장이사라는 게 없어서
트럭에 가재도구를 싣고 그 위에
주황색 천막을 씌워 수 시간을 달려
울산으로 갔다. 새벽부터 비몽사몽
트럭 운전석 뒤의 작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은 나는 배고프고 두려웠다.
시각장애인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나. 다섯 식구는 점심을 건너뛰고
울산이라는 낯선 도시에 짐을 풀었다.
어머니는 다른 것을 제쳐두고 식육점에서
돼지고기 1근을 신문지에 싸온 채
김치를 잔뜩 넣고 찌개를 끓여주셨다.
주먹만 한 두부에 비계가 덕지덕지 붙은
김치찌개를 밥에 비벼 먹었다.
식구들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지금도 겨울비가 내리거나
고단한 하루를 보냈을 때면
돼지고기와 두부가 잔뜩 들어간 김치찌개가 생각난다.
낯선 곳에서의 시작과 두려움, 배고픔 속에
몸과 영혼을 데워주던 그 음식이 그립다.
다음 주에 내가 가장이 된 우리 가족은
원주라는 도시로 이사를 간다.
그 날 만큼은 왠지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