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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현 Jan 01. 2021

영끌-영혼이 끌리는 우리 집

강원도로 튀어!

1주 전에 지방에 이사 갈 집을 보고 왔다.


우리 가정은 홈스쿨링을 하기 때문에

아이들 소원이 저택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이다.


아홉 살 큰 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빨간 머리 앤>의 초록색 지붕 집은 아니더라도

<초원의 집>에 나오는 독립된 공간에

사는 것이 오랜 시간 우리 가정의 바람이었다.


그런데 계획에도 없는 신축 아파트를 덜컥 계약했다.


단돈 500만 원이라도 걸고 빨리 계약하라는 말에

나는 재빨리 휴대폰 모바일 뱅킹 앱을 연다.

아뿔싸, OTP를 집에 두고 왔다.


공인중개사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구먼.'


계약이 성사돼야 중개사도 수수료를 받기에

중개사는 나를 자신의 새 차에 태웠다.

나는 공인중개사의 차에 올라타 원주 시내의 주 거래은행으로 향한다.

10분가량 차 안에서 이뤄지는 대화의 키워드는 영끌이다.


지금 못 사면 영원히 못 사요.

어떡하지.


은행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북적인다.


'내가 집을 영원히 못 사면 어떡하지?'


아내에게서 구원의 전화가 온다.

원주 사는 친구가 급하게 돈을 보내줬으니 빨리 돌아오란다.

돌아오는 길도, 부동산 강의는 이어진다.


계약 한 건 성사하기 위해 은행에 태워주길 마다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스피치 하는 중개사의 모습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피곤한 일은 회피했던 나의 나태한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중개사의 새 차에서 그의 눈물과 땀이 느껴졌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나는 어느새 집을 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은행에 돈을 꾸러 다니고, 모자란 돈을 구하기 위해 부모님께 부탁하고,

거래처에 잔금을 달라고 전화하고.

4명의 가족이 머물 집을 위해 분주하게 애쓴 요 며칠 간이었다.

우리는 강원도로 간다. 부동산 규제지역에서 탈출한다.


영끌해서 집 사는 얘기는 신문기사, 통계로만 생각했는데

진짜 집 사는 일은 나 같은 서민에겐

정말 영혼을 다해 돈을 끌어 모아야 하는 일이다.

돈이 더 있었으면 영혼을 끌어모을 필욘 없었을 텐데.

영끌이란 단어에서 영혼의 값이 돈보다 못한 것인가라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이제 조금 있으면 떠날 20년 된 빌라를 살펴본다.

10년 전, 결혼을 앞둔 내가 이 집을 처음 봤을 때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 때, 지방에서 올라와 기숙사, 고시원, 원룸을 전전했다.

그러나 한 여자를 만나 살 집을 구했으니

당시로선 투룸도 내게 감지덕지, 과분한 집이었다.


방 2개, 거실 하나, 화장실 하나.

우리 가족이 10년 간 살았던 이 집은 작은 집이지만

젊은 남녀가 쓸고 닦고 아이를 둘 낳고 살았던,

이 집은 단순한 매물이 아닌 따뜻한 가정이었다.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이 집에서 내게 넘치는 감사가 있었다.


10년 전 도배에,

10년 연식의 가전제품,

30년 된 피아노,

20년 된 장판이 작은 공간을 채우고 있지만

삶의 흔적이 묻어난다.


이 집에서 울고, 웃고 노래하고 기도하며

사랑하던 사람들이 오가며 따뜻한 대화가 넘쳤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이 먹고, 자고, 씻고, 쌌던 소중한 곳이다.


아늑한 조명에서 세월이 묻은 집을 살펴보니

마치 집이 살아있는 것 같다.

오래된 친구를 떠나는 것처럼 울컥했다.

영끌이란 영혼이 끌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혼이 끌리는 우리 집.


아이들을 품에 안고 이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준다.

아내가 기대어 젖을 먹이던 거실 한 구석에 벽지가 닳아있다.

싱크대 맞은편에 작은 그네를 달아주었다고 아홉 살 딸에게 말해준다.


'여기서 그네를 탔었다고요? 재밌었던 걸로 기억해요.

아니 사실 기억은 안 나지만 아기 때 내가 즐거워했겠죠.'


부동산 문맹인 우리 부부는 이번에 집 계약을 하면서

프리미엄이란 단어를 처음 알았다.

분양가에서 얹어지는 웃돈을 프리미엄이란다.


우리가 살던 전셋집도 이제 프리미엄이 붙었다.

오늘, 한 신혼부부가 우리 집을 보고 갔다.

도로 옆이라 시끄러워 우리 부부가 불평했던

안방 창문을 예비 신부가 활짝 연다.


'전망 좋네요.'


전망 좋다. 이 집에 들어올 부부가 잘됐으면 좋겠다.

차 먼지도 있고, 때론 한밤 중 옆집의 고기 굽는 냄새가 나는 것으로

때론 괴롭겠지만 이 집에서 아기도 낳고 행복하게 웃으며

잘 살았으면 좋겠다.


울며, 웃으며 먹고, 기도하며

또 다른 집을 얻을 때까지 잘 머물다가면 좋겠다.

마음속으로 빌어주는 우리 부부의 마음이

이 집의 또 다른 프리미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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