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결혼하고 처음 이사를 하며
10년 동안 썼던 가전제품을 바꾸었다.
예산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인터넷몰이 쌀지,
매장에서 패키지가 쌀지를
고민하다가
세탁기, 건조기, 식세기는
매장에서 전시품을 샀고
냉장고 하나만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긴 문짝 하나,
위아래 작은 문짝 2개를
구성해서 가전을 나답게
선택하는 것 같아서
잠시 뿌듯했지만
실상은 가장 싼 구성을
이루었기에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싼 걸 사는 게 나다운 것이다.
지질한 나다움을 받아주는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우여곡절 끝에 100만 원에
핫하다는 냉장고를 긴 문짝 하나,
작은 문짝 두 개로 선택하여
살 수 있어서 한동안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비스포크 제일 싸게 샀다!"
이사 후 모든 가전제품들이
설치되며 이제 냉장고만 남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먹던
냉장고 안의 식품들도
냉장고를 기다렸다.
그런데 기다리는 냉장고는 오지 않고
세 차례나 1대 1 고객 문의를 했지만
수일 째 답변 대기였다.
어쩔 수 없이 상담원과 통화해야 해서
스피커폰을 켜놓고 볼일을 보며
50분 만에야 통화가 가능했다.
상담원과의 통화가 끝나고
저녁에 문자가 왔다.
"고객님 주문하신 냉장고
익일 배송됩니다."
내가 아는 익일은 내일인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냉장고는 오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일까.
우리 집 이전 냉장고의 냉동고에 머물던
식품들은 차례차례 음식물 쓰레기장에
버려지고 냉장 식품들도 그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냉장고가 오기까지 우리는 최소한의
식재료를 사서 다용도실에
보관하고 있었다.
다행히(?) 날씨가 덥지 않아
식재료를 꺼내러 다용도실에
들어갔을 때 커다란 냉장고가
느껴져서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냉장고는 와야 하기에
나는 인터넷 주문내역을 확인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냉정한 눈길로 주문내역을 보니
한 단어가 내 눈에 박혔다.
"도어 단품"
우리는 100만 원에 냉장고 문짝
3개를 산 것이다.
아내와 나는 그 주문내역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또다시 스피커폰을 켜고
상담원과 통화.
나는 100만 원에 냉장고 문짝
3개를 살 사람이 아니라며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고 환불을 받았다.
다시 냉장고를 고르고 이제
우리 집에 올 냉장고는 배송 대기 중이다.
아마 설 이후에나 냉장고가 올 예정이다.
냉장고 없이 2주간을 보내고 있다.
살기에 괜찮다. 살만하다.
조금의 불편함이 있지만 오히려
덜 먹게 된다. 먹지 않는 식품들은
잘 정리하게 된다.
냉장고 문짝만 산 내 실수로
없어도 괜찮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어쩌면 먹지도 않을 식재료와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어둔 것처럼
결핍을 채우기 위해 소비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내면을 살필 수 있었다.
참, 생각해보면
냉장고 문짝만 배송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