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오며
내 주된 밥벌이인 영상제작을 위해
장비도 집에 두게 되었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강남 한복판의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 미팅과 촬영은
서울에서 하더라도 편집 작업은
집에서 하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주된 의문은,
'집에서 일이 되냐'
는 것이다.
일이 된다. 정말 잘 된다.
그게 문제다. 나는 일중독자다.
내가 영상편집을 본격적으로
돈 받고 시작한 때는
대한민국 굴지의 영화 편집실이다.
영화 편집실에서 조수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냥 가정집이나
아파트, 오피스텔일 경우가 많다.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출근해서
오피스텔에 도착하면 나는 반바지로
갈아입고 편집을 했다.
마감을 앞둔 날이면 편집하는 방에
이불을 깔고 쪽잠을 자다가
다시 일어나서 편집을 했다.
출산을 하고도 마감을 넘기지 않으려고
편집을 하던 선배에게 배운 덕분에
나는 마감을 넘긴 적이 없다.
정말 혹독하게 배웠다.
이때 실력은 부쩍 늘었지만
부작용이 지금까지 있다.
마감을 앞둔 나는 예민해지고
정말 여기에 목숨을 건다.
집에 장비가 있으니 마감을 앞둔
프로젝트가 있으면 일을 놓고 싶지 않다.
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어제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서
나지막하게 말했는데 아이들과
아내가 듣고 적잖이 겁이 났다보다.
"폭발할 거 같아..."
이 말을 들은 세 여자는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장비를 끄고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여유로운 생활을 하려고
이 곳에 왔는데 오늘 하루
일이 시간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말로 상처를 주었다.
나는 욕조에서 피로한 몸과 마음을
정리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딸들 방에 가서 대화를 하려는 순간,
콧물이 나는 것 같아
코에 손을 대니 붉은 것이 손가락에 묻었다.
앗, 코피.
딸들은 나를 거실 소파에 뉘어놓고
안마를 해주며 홍삼 한 숟갈을
입 안에 밀어 넣는다.
이 맛에 아빠 한다니까.
마감을 앞둔 영상 프로젝트,
마감이 없는 두 번째 책 쓰기.
이 둘을 병행하기 위해 연신
커피를 마시며 코피를 쏟는 나는
딸들의 위로를 받으며 인생의
마감을 생각해본다.
열심히 사는 것이 맞지만
인생의 마감을 무시한 채
눈 앞의 마감만을 쫒는 것은
참으로 불행이다.
오늘은 매일 새벽 5시에
줌으로 하는 독서모임을
하루 쉬고 아침 7시까지
마음 놓고 푹 잤다.
모처럼의 땡땡이를 치면서
책을 쓰고 새벽 독서를 하기 전에는
얼마나 안이하게 살았는지
또한 되돌아보게 된다.
소파에 누워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는
내 얼굴을 찍은 딸의 사진을 보며
내 마지막 모습을 상상해본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웃으며 세상을 마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