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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Jun 09. 2024

어른의 맛

웰치스 그리고 닥터페퍼

슈퍼 음료대 앞에 섰다. 한 바퀴 쓱 훑어보던 눈이 희뿌연 액체에 파란색 띠가 둘러진 플라스틱  병에 멈췄다. 매번 사려고 할 적마다 보이지 않아서 사지 못했던 이온 음료였다. 반가운 마음에 의식할 새도 없이 손이 튀어 나갔다.

일행이 음료를 고르는 동안 나는 유유자적 음료대를 계속 구경했다. 그때 유독 눈에 들어오는 음료가 있었다. 닥터페터. 순간 갈등이 시작됐다. 이걸 먹을 것인가? 저걸 먹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한동안 눈이 두 음료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잠시 후 이온 음료가 제 자리를 찾아갔다.  

   

어릴 적 어머니는 농약을 치고 온 아버지에게 설탕물을 타드렸다. 요즘 흔히 먹는 흰 설탕이 아닌, 검은색에 가까운 흑설탕이었다. 설탕물이 농약을 중화시킨다나? 그럴 리가. 그러나 그땐 내게 제일 중한 건 '그 달콤한 물을 어떻게 얻어먹느냐?'였다. 얼마나 애타게 아버지를 바라봤을까? 애탄 시선이 나뿐만은 아니었겠지만, 마지막 설탕물 한 모금은 언제나 막내인 내 몫이었다.

달콤한 것에만 조급증을 일으키던 시절이 아니었다. 뭐든 귀했고 먹어보지 못한 게 너무 많아서 어떤 걸 먼저 먹고 싶다고 줄 세우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바람조차 이뤄질 가망성이 없어 그다지 열정적이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때 같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급격히 가까워진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시민회관에서 팬들이 HOT 전시회를 열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나 사진 인화시스템이 발달하지도 않았던 시절인데 그 많은 사진은 어찌 다 모으고 출력했을까?

전시회가 끝나고 친구와 롯데리아에 갔다. 18년 내 인생의 첫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그곳에서 뭘 고를지 몰랐던 나는 겨우 애플파이를 골랐다. 바삭이는 파이 껍질 안에는 혀가 아릴 정도로 단 사과절임이 들어있었고 그 단맛을 꾹 눌러주는 계피향이 미각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건 시간이 지난 후의 감상이고 당시엔 입안 전체를 홀딱 델 정도의 뜨거움만 남았다.     


대학은 외지로 진학했다. 그때부터 새로운 삶이, 아니 새로운 맛이 시작되었다. 세상엔 신기하고 맛난 음식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런데 색다른 맛을 보기 위해 애를 쓰진 않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지. 나는 여전히 자취방에서 된장국을 끓이고 참치 김치찌개를 상 위에 올렸다. 나는 맛에 있어 진취적이지도 않았고 어떤 리스크를 짊어질 배짱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맛의 모험을 떠날 리가 없었다. 알고 있던 맛에의 안주(安住)였다.


빈약한 맛의 세계 속에 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게 '어른의 맛'으로 기억되는 게 있긴 하다. 그것은 소박하게도 ‘웰치스’와 ‘닥터페퍼’였다. 이 음료들을 어디서 처음 먹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미팅이나 소개팅 자리에서 먹었을지도. 이것들은 담배나 술처럼 구입 시 신분증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어른의 맛이라니?

그 뒤로 데이트를 하고 새 친구들을 만나면서 쌀국수, 망고주스, 봉추찜닭도 먹으면서 내 맛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지긴 했다. 그럼에도 특별히 저 두 음료가 내게 ‘어른의 맛’이라고 명명될 수 있었던 건 어릴 적 단물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단 성인이 되어 본 음식 중에 그나마 내게 가장 만만한 맛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생일 때도 이후 사회인이 되었을 때도 나는 항상 풍요롭지 못했으므로.     


사회인이 된 후 상사와 인천공항에서 있었을 때의 일화다. 특출 난 취미활동도 취향이랄 것도 없는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 비행기 시간만 기다렸다. 그때 상사가 소곤대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가만히 앉아있지만 말고 라운지 내 음식도 맛보고 살 게 없어도 면세점을 둘러보도록 해요."

그 말에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나는 쭈뼛거리며 음식을 조금씩 맛보았고 휘황찬란한 면세점 속으로 나아갔었다.


이제 나는 음료를 고를 때 20대처럼 탄산을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 지인들처럼 하루에 커피 몇 잔만 마시려고 애쓰지 않고 카페에 가면 그곳에서 제일 신기한 음료를 주문하는 일을 즐긴다. 그런데도 내가 제일 자주 마시는 건 역시나 그냥 물. 그저 아주 가끔 웰치스나 닥터페퍼를 '어른의 맛'이라 추억하며 마실 뿐. 근데 어른의 맛이란 게 뭐 별 거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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