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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Jun 16. 2024

내 입 속 제철 행복

당근에서 보리수를 사다

"안녕하세요? 보리수 살 수 있을까요?"


당근마켓에는 별 게 다 있다. 사놓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제품도 이런 걸 누가 돈 주고 사나 싶은 쓰레기 같은 물건도 심지어 자동차나 아파트도 올라온다. 그 덕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을 물건들이 즐비한 당근마켓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늘 나의 구미를 당긴 매물은 보리수였다. 전날 엄마랑 한 통화가 떠올랐다. 엄마는 주인 없는 보리수나무에서 열매를 한껏 땄는데, 너무 많아서 술을 담그고 청을 담갔다 하셨다. 그녀는 항상 이런다. 그래서 친정에 가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과실주와 청이 가득하다. 이건 꼭 '나는 자연인이다'의 창고를 보는 기분이랄까?

"가까이 살았으면 내가 얻어먹으러 갔을 텐데..."

나는 엄마나 아빠가 이런 말을 듣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없어 안타깝고 슬픈데도 왜 저런 말은 좋아하는 걸까?


이 통화가 어제였는데, 바로 당근에서 보리수를 봤다면 운명이라고 말해도 좋을법하다. 판매자의 농장은 제법 먼 거리였지만 집은 멀지 않았다. 농장에서 수확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1kg에 7,000원이면 가격도 괜찮다.

다시 연락을 해온 판매자는 선주문한 물량을 채우고 나니 남은 게 1kg이 되지 않는단다. 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마 보리수가 끝물은 아닐 테니 또 기회가 오겠지. 나는 낙관했다.


"남은 보리수 900g을 5,000원에 사가시겠어요? 제가 죄송해서요."

죄송할 일도 아닌데, 혹하는 제안을 해오는 판매자에게 나는 오케이를 외쳤다. 그렇게 만난 그녀는 내 어머니뻘이었고, 농약 한 번 치지 않아 따면서 먹기도 했단 첨언을 했다. 그 마음을 안다. 내가 경작한 농산물 믿고 먹어도 된다고 어필하고 싶은 마음을.


올해 첫 보리수를 먹을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집에 오자마자 찬물에 씻자 보리수는 더 말개졌다. 그것은 달콤하고 새콤하고 텁텁했다. 먹을 게 흔하고 그때만큼 배가 고프지 않아도 어릴 적 맛보던 그 맛이었다.

하교한 아이 앞에 보리수를 내놨다. 이 구입에는 보리수라는 걸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아이에게 맛 보여주고 싶은 의도도 숨어 있었다. 처음 보리수 얘길 했을 때 아이는 그게 뭐냐고 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석가모니가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는 얘기뿐.

아이가 보리수 한 개를 조심히 입 안에 넣었다. 요즘 아이치곤 편식이 심한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새로운 음식엔 조심스럽고 수틀리면 아예 먹지 않기 때문에 절로 긴장이 됐다.


올해 봄에도 나는 머위 나물 반찬을 해 먹었다. 머위는 잎의 쓴 맛 때문에 주로 머위대를 기름에 볶아 먹는다. 그게 또 얼마나 맛있게요? 머위가 어릴 때는 쓴 맛도 덜하고 연해서 잎과 대를 모두 나물로 무쳐먹는다. 삶은 머위잎에 된장과 고추장을 반반씩 넣고 간 마늘, 참기름 그리고 깨를 톡톡 뿌리면 끝. 쌉쌀한 맛과 나물 특유의 감칠맛이 어우러져 계절 바뀐다고 집 나갔던 입맛이 '오메'하고 바로 돌아온다.


제철의 것들에 민감할 수 있는 것은 팔 할이 부모님 덕분이었다.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고, 부모님이 농부셨고,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나마 제철 음식이라야 내 밥상까지 도착할 확률이 높았다.

우리는 어릴 적 맛본 음식에 더 친숙함을 느낀다. 어른이 되어 더 쉽게 빠져들 수 있고 그땐 이상했어도 다시 도전해 볼 마음이 든다. 어릴 적 나는 계절마다 산과 들로 열매를 따먹으러 다녔고, 밥상 위의 나물은 계절마다 그 종류를 달리했다. 당연히 풀이나 나무 이름도 많이 아는 편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풀과 나무는 눈으로 즐기는 묘미였으므로.


'제철 음식이 보약'이란 말이 좋다. 매해 '올여름엔 자두와 복숭아를 열심히 먹어야지!' 다짐하는 것도 같은 마음이다. 꼭 제철 음식이라야 더 몸에 좋을 리 없겠지만, 대단한 행복은 못 챙겨도 제철 음식, 제철 꽃이 주는 행복만은 더더 많이 누리고 싶다.


"으~ 이상해."

아이가 으깨진 보리수를 입 밖으로 내어 놓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하며 나만 보리수 먹기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아이가 옆에서 보리수를 한 개씩 야곰야곰 먹기 시작한다. 입으론 계속 이상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그녀는 보리수를 몇 개 더 먹었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과에 흐뭇해하며 나는 다짐 하나를 한다. 아이에게 더 많은 맛을 열심히 맛 보일 것이라고.


p.s 나에게 보리수를 팔았던 판매자는 농산물 판매로 잠시 판매정지를 먹었고, 1kg도 아닌 보리수를 나는 혼자 테나게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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