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밥통 사건

by 은섬

마법의 문장이다.

"수리비가 많이 나와 새로 사시는 게 낫겠는데요?"

말이 안 된다. 수리비는 5만 원가량이었고, 새 제품은 10만 원도 훨씬 넘는데 새로 사는 게 낫다니. 그럼에도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나면 한쪽으로 훅 기운 저울은 보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24년 가을에 산 밥통이었다. 이전에 쓴 제품이 기대보다 짧은 5년을 사용 후 문제가 생겼기에 브랜드가 문제인가 싶었다. 경쟁업체의 제품은 이전 것보다 훨씬 더 흰 자갈을 닮은 디자인이었다. 문제가 생긴 건 구입 후 1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취사 완료 알림을 듣고 연 밥통엔 내부 솥뚜껑이 떨어져 있었다. 혹시 뚜껑을 약하게 끼워서 그런가 한 번 더 꾹꾹 눌러봐도 매번 빠짐없이 떨어졌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사실, 이 밥통은 처음부터 문제였다. 몇 가지의 제품을 비교해서 골라놓고 마지막 결정만 남겨둔 상태였다. 최종 두 제품의 가장 큰 차이는 내솥이었다. 하나는 많이들 사용하는 코팅 타입이었고, 다른 하나는 올스텐이었다. 좋으니깐 all로 만든 거 아닌가? 몸에 덜 해로울 것 같고, 밥맛도 더 좋을 것 같았다. 땅땅땅, 결정!


올스탠이라서 더 고열이어서 밥이 더 맛있게 됐냐고? 글쎄... 확실한 것 하나는 코팅 내솥에 비해 압도적으로 밥이 솥에 잘 붙었다. 코팅은 심심해서 하는 게 아니었다. 주걱으로 밥을 푸면 솥을 따라 오르며 밥덩이가 주르륵 묻는다. 최상단에 올라서는 밥솥 너머로 툭 떨어진다. 고열인 밥솥은 벽에 붙은 밥알과 흔적을 금세 말려버린다. 각도를 달리하면 다를까 싶어 낮췄다가 아, 뜨거!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엉망이 된 내솥은 뜨거운 물에 제법 불려두지 않으면 닦이지 않는다. 급하게 밥을 해야 할 때마다 곤란함에 구시렁이 자동으로 튀어나갔다. 밥도, 설거지도 안 하면서 이런 밥솥을 고르고 밥까지 파헤쳐놓는(우리집은 먹을 만큼 밥을 스스로 푼다.) 남편이 미워 견딜 수 없었다. 어느 날은 남편이 욱해서 외쳤다. 그렇게 불편하면 새로 사라고. 열불이 났다.


"돈이 어딨어!!!"

이후로 나의 구시렁은 볼륨을 많이 낮췄지만, 깔끔히 사라지진 않았다. 때론 돌덩어리처럼 눌어붙은 밥알 떼기를 깔끔히 포기하고 남겨둔 채 그대로 밥을 한다. 내 기준 쌀이고 밥이니 깨끗하지만, 깔끔쟁이 남편이 알면 기겁할 일이다. 그런 사실을 상기하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니가 고른 밥솥이니 더러운 거 먹어라. 메롱!


지난 달, 새로운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혹시 패킹 때문인가? 본품과 내솥 뚜껑을 연결하는 패킹이 삭은 건가 싶었다. 확실히 손끝의 느낌이 물렀다. 물론 1년도 안 된 시점부터 그랬으니 아마 불량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고 지중에 나왔을 확률이 높았다. 진작 A/S 를 받았다면 무상 교체가 가능했을지도 모르는데, 40년 넘게 살면서 처음 보는 꼴에 미처 떠올리지 못한 가능성이었다.


내가 사는 도시엔 A/S 센터조차 없었다. 내가 필요한 패킹은 1개뿐인데, 판매는 세트로 이뤄졌고 가격도 싸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사야지! 재고 확인 후 바로 구입했다. 그날 저녁 떨리는 마음으로 취사가 끝난 밥솥을 열었다. 오마이갓!!! 뚜껑이 안 떨어졌다. 당연한 일이지만, 반년 넘게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나는 감격에 젖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집 밥통 사건은 일단락됐다.


집에 가전제품이 적지 않다. 게다가 필수가전의 수는 계속해서 늘고 있다. 그 많은 가전제품 중 가장 나를 닮은 걸 꼽는다면 역시 밥통이다.

주부인 내게 매일 저녁밥 준비는 하루의 가장 큰 미션이다. 밖에서 일을 보다가도 3시가 되면 오늘 뭐해먹을지 고민이 시작되고, 오후 6시까지 컴백홈해야 하는 신데렐라 같은 삶. 그래서 이 작은 사건에 그렇게나 몰입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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