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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 Seed Sep 28. 2023

빵과 아몬드 열 알이 주는 의미

반전이 주는 재미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반전이 주는 재미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2022년 봄, 석사 3학기에 접어든 나는 무려 9과목을 수강하고 있었다. 4학기에 논문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무리를 한 것이다. 과제가 많기로 악명 높은 바이도비치 교수의 내레이션 수업에서부터 미학과 학장인 산도르 교수의 현상학 수업에 이르기까지 매일 초를 다투며 과제를 하고 있을 무렵 지도교수에게 연락이 왔다. 여성감독 특강이 열리니 가능한 참석하라는 이메일이었다. 가뜩이나 할 공부가 많은데 특강까지 참석하라니, 투덜거리며 참고문헌과 참고영화를 다운로드하였다. 다음 날 있을 수업의 과제와 예습을 마친 후, 침대에 누워 다운로드하여 놓은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출처:https://photogenie.be/the-idea-of-history-in-kelly-reichardts-first-cow/


조명 감독이 없었나? 싶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화면에서 개와 함께 하이킹을 하던 여성이 우연히  두 해골을 발견하고 이야기는 1820년대 미국 서부개척시대로 페이드-인 된다. 안 그래도 노안이 와 시력이 안 좋아진 터라 뿌옇고 어두운 화면에 반감이 생겼는데 ‘일확천금’을 쫓아 개척지로 간 미국 남성들의 이야기라니.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웨스턴 장르를 3학기 내내 주야장천 보고 있던 터라 영화 시작과 동시에 흥미가 곤두 박칠 쳤다. 웨스턴 장르에서 개척자 정신과 마초이즘을 통해 보이는 식민주의사관에 넌덜머리가 난 상태였고, 종주국인 미국 웨스턴에서 시작하여 스파게티 웨스턴, 구야시 웨스턴, 김치 웨스턴에 이르기까지 각 나라의 웨스턴물을 종합세트로 보고 비교 대조하는 에세이를 몇 번 쓰다 보니 웨스턴이라면 이제 피하고 싶었다. 


반쯤 감은 눈으로 아예 침대에 드러누워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영화/영상이론을 전공하는 학생이 누워서 영화를 본 다는 것 볼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30분쯤 지났나? 화면이 조금 밝아져서 의도치 않게 집중을 하게 되었는데 두 남자주인공이 대단한 일을 모의하는 듯 쑥덕거리고 이어지는 화면에는 허름한 주방이 클로즈-업 되어 보이면서 서사의 전개를 뒤집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이 남자들 빵을 굽고 있잖아!’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의 2019년 영화 <퍼스트 카우(First Cow)> 중


두 눈이 번쩍 떠지고 동시에 90도 정자세로 똑바로 앉아 영화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1.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의 2019년 영화 <퍼스트 카우(First Cow)>의 플롯이다. 언뜻 영화의 세팅은 ‘웨스턴’의 장르를 따르는 듯 하나, 서사의 전개는 주인공이 삶의 의미와 정체성을 찾기 위해 ‘빵’을 굽게 된다는 이야기로 전형적인 웨스턴 장르물을 기대했던 관객에게 반전을 준다. 주인공 쿠키가 일확천금의 꿈을 좇아 도착한 개척지는 말 그대로 황무지이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거주할 공간도 그 어떤 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모피 사냥꾼들과 생활하는 주인공은 이곳에서 영웅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일확천금’을 찾는 모험에 맞설 용감무쌍한 전사 스타일도 위기의 순간을 영리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전략가 스타일도 아니었다. 무리에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살아가던 중, 위기에 처한 한 동양인 남성 킹 루를 구해주면서 둘은 친구가 된다. 향수병에 젖어 옛 시절을 그리워하던 중 그들은 문뜩 모국의 ‘빵’이 그립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 베이커 출신의 쿠키의 눈에서 광채가 돌며 말한다. ‘나 빵을 구울 수 있어. 아주 맛있는 빵을 말이야.’ 이렇게 두 친구는 ‘빵’을 만드는 것에 몰두한다. 모두가 ‘금’을 찾고 있을 때, 그들은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 개척지 지주의 소에서 우유를 훔치는 일을 ‘목숨’을 걸고 감행하며 개척지에 빵가게를 창업하며 현대판 기업가(Entrepreneur.)가 되기를 꿈꾸는 이야기다. 영화를 보고 나니, 첫 장면에서 섬뜩하게 보았던 두 해골의 모습에서 ‘웃음’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전혀 예상치 못했거나 자신이 야기하지 않는 낯선 상황에 직면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한다. 이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황무지에 내던져졌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수단이 ‘나’라는 도구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황무지로 떠나오기 전에는 빵가게를 창업할 생각을 못했던 <퍼스트 카우>의 주인공 쿠키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처럼 나 역시 이곳으로 이주하여 내가 어떤 것에 재능이 있고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주 이후 모든 것이 낯선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니 나를 새롭게 정의 내려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상황이 많아졌다. 





2.

나는 누구인가?

어린 시절의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한다. 혹자는 기억이 과거를 편집한다고 하는데, 어떤 기억은 시간 밖에 존재하며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보다 훨씬 더 생생하다. 나의 경우 특정 사건들은 소품과 분위기까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14살,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도덕 시간에 인간은 약 11세부터 사춘기를 겪게 되고 이 시기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아 정체성에 의문을 품고 답을 얻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을 배웠다. ‘지금 내 나이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는 팩트라는 표정을 지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이는 나뿐이었다.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범, 오래된 외면 전시 설치 샷 


방안 침대에 걸터앉아 왜 나만 모르는 것인지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추궁하기 시작했고 이에 갑자기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공간은 무엇이며 또 시간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답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내 숨이 막혀왔다. 내가 여기 있는데 나는 이 공간을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 그러니까 이 공간이라는 것이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발로 찰 수도 없는 공허한 것인데 그러한 공허 속에 내 육신이 있다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이는 시간에 대한 궁금즘으로 이어졌다. 어린 나에겐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공허한 개념이었다. 시간은 왜 앞으로 가기만 하는 거지? 1년 전에 나는 분명히 여기에 있었는데 왜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거지? 과거의 나는 과거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왜 지금은 존재할 수 없는 거지?  왜 나는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에 있는 거지? 

한참을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과외 선생님에게 물어보았지만,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하라고 꾸짖음을 당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비밀을 나만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 없다는 걸 알자, 나는 이에 대한 해명을 지어냈다. 14년을 살아왔던 세상의 경험치에 기대어 나름의 논리를 갖추어서. 나의 논리는 이랬다. 


(1)   태어나기 전에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에 의해 수업이 있었을 것이다. 

(2)   그 수업의 내용은 ‘너는 어떤 나라의 어떤 부모 아래서 태어날 것이며 그 시간과 공간은 이렇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고 ‘앞으로 너는 무엇이 되어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는 지침이 있었던 것이다. 

(3)   그런데 나는 그 수업을 빼먹은 것이다! 오늘 속셈학원을 안 간 것처럼! 

(4)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5)   나는 패배자이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수업을 빼먹어 삶의 진도를 따라갈 수 없는 패배자. 


당시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 빼고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게 결정짓고 나는 얼마간 패배자가 되어 살았다. 


그런대로 삶은 흘러갔고 어느 순간 입시를 치르고 대학원을 졸업하여 사회인이 되었다. 어느덧 나는 사교성이 매우 좋은 현대 미술 전문 큐레이터가 되어 있었고 때로는 알파의 능력을 발휘하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한 번에 처리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사업을 하면서도 나는 ‘나’에 대한 생각보다는 항상 사회와 조직에 유용하고 유능한 인재가 되는 쪽으로 내 성격과 취향을 맞추어 왔다. 그리고 그게 내 정체성인줄 알고 살아왔다. 사회에서는 업무 능력이 뛰어나고 일 매너가 좋은 알파 우먼, 집에서는 내 가족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내가 있었다. 


그런데 43년 동안 내 정체성을 정의 내렸던 모국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세팅에 내던져지니 내가 알았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반전에 반전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나 흥미로운 존재였다니! 외향적인 줄만 알았던 내가 이렇게나 내향적인 사람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꽤 많은 식구가 드나들던 집에서 자랐다. 엄마는 은연중에 사랑을 많이 받으려면 남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사교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활발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누구도 나라는 존재를 알지 못한다고. 그렇게 나는 활발하고 사교적인 이이가 되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는 항상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일하는 갤러리 큐레이터, 어학원 원장을 거치면서 나는 한층 더 사교적이고 활발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다. 


3.

그런데 이주하고 나니,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외로움을 못 견디는 외향적 성격에게는 지독히도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나는 석사과정을 마치는 지난 2년 동안 딱히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영화/영상이론을 전공하는 덕에 수많은 영화를 본 덕도 있지만, 무수한 이론서를 읽으며 이에 대한 글을 쓰는 일에 바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학원 수업이 그렇겠지만, 특히 인문학을 전공하는 경우 해당 아티클이나 책을 읽고, 이에 대한 자신의 창의적인 의견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한데 나에게 이 일은 일종의 저자들과의 대화 시간이었다. 그렇다. 외향적인 줄만 알았던 나는 사실 혼자 노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음식에 관해 말하자면, 서울에서 나는 김밥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흘리지 않고 한입에 쏙쏙 간편하게 어디서든 먹을 수 있고 나름의 영양소를 골고루 갖추었고 나름 배까지 부르니 일을 하느냐 바쁜 나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삼각 김밥에서 저렴한 분식집 김밥 그리고 백화점 푸드 코드의 고급 김밥까지 참 다양한 종류의 김밥을 무지하게도 많이 먹었다. 그런데, 이주한 이후에는 김밥을 거의 먹지 않는다. 그렇게 좋아했다면 한인 마트에서 재료를 사서 김밥을 먹을 수도 있었을 테고 부다페스트에 즐비한 한식당에서도 김밥을 충분히 사 먹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 와서 김밥을 안 먹는다. 


대신 나는 아침에 꼭 열 알의 아몬드를 먹는다. 한국에 살 때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몬드를 말이다. 양념이 가미되지 않는 아몬드는 하루 견과 안에 들어있는 제일 맛없는 것이었다. 눈을 뜨면, 초고속으로 준비를 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장 큰 사이즈로 만들어 출근을 하고 매일 랜덤 하게 잡히는 상담 업무에 때문에 끼니때 식사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생각해 보면, 아몬드를 싫어했던 게 아니라 딱딱한 아몬드를 꼭꼭 씹어먹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일상으로 스트레스성 장염을 달고 살았고 위염과 위궤양은 내 몸의 일진처럼 군림했다.


이주한 이후 아침을 신경 써서 먹기 시작했고 공복과 위염에 좋은 여러 식단을 시도했다. 오트밀이 위염과 공복에 좋다는 말에, 다양한 토핑을 얹혀 먹어보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아몬드를 토핑 해서 먹었는데 밤새 부드럽게 퍼진 오트밀 사이에서 오독오독 씹히는 아몬드를 함께 먹으니 입안 가득 퍼져 오는 고소함이 그렇게 맛이 좋을 수 없던 것이다. 그리고 이 미각에서 오는 만족은 이내 뇌로 전달되었다. 오트밀의 부드러움이 오늘도 평온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 아몬드의 고소함이 그러한 평온에 샷을 추가한 듯 부스터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혀끝에 느껴지는 꿀의 달콤함은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될 것이라는 내적 편안을 가져다주었다. 

일어나서 출근하기 바빴던 서울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아마도,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닌 타인으로 향해있던 서울에서의 나는 빠른 업무 처리를 위해 최적화되는 인간이어야 했기 때문에 김밥과 같은 간편한 음식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주한 후 삶의 중심이 올곧이 나에게로 집중되었고 음식을 먹을 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40 평생 몰랐던 아몬드에 대한 사랑을 발견했다. 동시에 ‘나는 얼마나 나를 모르고 무심히 살았왔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몬드 열 알을 아침에 꼭 먹는 것은 단순한 아침식사가 아니다. 이것은 퍼스트 카우의 주인공이 황무지에서 빵을 굽는 일처럼, 내겐 이주 이후 이곳에서 나를 찾아가는 리츄얼이기 때문이다. 결국 삶은 황무지에서 나만의 빵을 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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