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서울에 살았을 때, 나와 남편은 운이 좋으면 일주일에 하루 정도 시간을 함께 보냈다. 문화재단의 갤러리에서 근무하던 그는 주말 중 하루를 출근해야 했고 나 역시 토요일은 학원이 바쁜 날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일요일에 출근을 하는 날이면 일주일 동안 우리는 거의 각자 생활했다. 평일 저녁,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피곤한 몸뚱이를 이끌고 집 앞 기사식당에서 밤늦게 만나 감자탕을 한 그릇씩 먹으며 잠깐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그랬던 우리가 이제 하루 삼시세끼 함께 먹으며 일상의 소소한 일들까지 미주알고주알 떠들며 공유한다. 또 그렇게 원했던 공부도 헝가리의 명문대에 입학한 덕분에 원 없이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이 일상이 되었다. 스무 살은 어린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다 보니, 인관관계가 그리 넓지 않아 속 섞을 일도 없다. 무엇보다, 사업을 그만두고 이주하자마자 진상 고객의 횡포에서 벗어나 삶이 매우 평온하다.
새삼 놀랍다. 부다페스트로 이주하기 전에 가졌던 결핍은 채워졌고 이제 일상이 되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내 삶에서 이런 요소들이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주라는 큰 모험을 강행하게 한 핵심적인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한 결핍을 잊고 살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부다페스트로 이주하기 전에 가졌던 결핍은 채워졌고 이제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떠나올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낯선 환경과 문화에 내던져지자 비로소 ‘나’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유치원생도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나 역시 그런 줄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어떤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끼지는 잘 모르는 채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나는 마흔이 훌쩍 넘어, 생판 모르는 곳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을 때 평온함을 느끼고 행복 해하는지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모국, 부모 그리고 모국의 문화와 같은 것들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주어진 조건 하에서 내 정체성을 파악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대한민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성격과 능력을 어느 정도 닮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특정 직장에 들어갈 것이다’라는 유전적 요소와 한국 사회의 문화가 만들어낸 틀 안에서 나 자신을 규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어나면서 길들여져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모국의 사회, 문화로부터 벗어나 부다페스트로 이주한 후 이것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어릴 적 나를 괴롭혔던 그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다시 답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