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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가 싫다며 울먹이는 딸에게

2025년 11월 셋쨰주

by jcobwhy

11월 17일

아빠는 요새 박사과정 지원을 위해 전에 같이 일하던 분들께 추천서를 요청하기 위해 연락을 드리고 있어.


벌써 미국에 온 지 3년이 넘었으니까 짧게는 3년 반, 길게는 4~5년이 되신 분들도 있어.


아무래도 미국에 있고 해서 평소에 연락을 드리기가 쉽지 않았지. 그래서 그런지 오랜만에 전화를 드리려니 너무 떨리더라고. 아빠 회사의 후배도 있었는데 연락을 하기가 무척 부담스러웠어. 다행히도 모두들 흔쾌히 승낙을 해 주셨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


아빠는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평소에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 아빠가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았다면 이렇게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기 힘들었을 거야. 물론 확신은 없었지만 말이지.


두 번째는 도움을 청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야. 보통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지. 작년에 이어서 두 번째 도움 요청인데 과정이 늘 쉽지는 않아. 막상 전화를 드리면 모두들 흔쾌히 돕겠다고 하시는데도 말이지.


우리 딸도 아빠의 다짐처럼 생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고.


11월 19일

자아실현을 한다면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일에 치여 살다 보면, 생산성에만 매달려서 효용과 효율에만 집착하기 쉬워.


그럴 때는 잠깐 거리를 두고 느리게 걸을 줄도 알아야 해. 마냥 앞만 보고 달려서 깃발을 뽑는 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란다.


아빠가 3여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집안일만 했잖아. 그러다 보니 효용성, 가치가 떨어지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불안감이 굉장히 높아졌었어.


스스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계속 그런 불안이 무의식에 누적되었는데, 요즈음 아빠가 추천서를 받기 위해 회사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다시 폭발적으로 휩쓸게 되더라고. 저 사람들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는데, 난 뒤쳐지고 있구나 하면서 말이야.


그렇지만 금방 마음을 돌릴 수 있었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들이 많고, 커리어의 성공이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거든. 만약 계속 생산성의 굴레 안에만 있었다면 절대 가족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을 거야. 네가 자라는 것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고 말이지.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 그게 수개월 수년 이어져도 괜찮아. 스스로 돌보고 아끼는 방법이란다.


11월 23일

오늘은 엄마 생일이었어. 특별한 이벤트도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지.


사실 엄마는 이런 특별한 날을 잘 챙기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대단한 이벤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말과 서로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그런데 네가 지난번 네 생일에 그냥 지나가지 않고 뭔가 이벤트를 하려는 것에 대해서 너무 거부반응을 보이고 울기까지 하니까, 엄마 생일을 그냥 그렇게 지나가버린 것 같아.


딸아.


소중한 사람에게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이 크다는 것을 잘 알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단다. 때로는 그저 상대방이 알아주겠거니 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 늘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전하렴. 그래야 너도 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엄마나 아빠야 어떤 상황에서도 너를 똑같이 사랑하겠지만, 타인과의 사이에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단다.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한 거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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