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넷째 주
11월 25일
오늘은 네가 스케줄이 꽤나 빡빡한 날이라며 불평을 했어. 학교에선 밴드 연습과 스피치 앤 디베이트 방과 후 수업이 있는 데다, 학교가 끝난 이후엔 시내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러 가야 했지. 학교에서 저녁 늦게 끝나는 엄마를 데리러 시내에 가는 김에 넌 도서관에 가서 네가 읽고 싶은 책을 빌릴 참이었어.
그런데 엄마가 오늘 학교 스케줄이 사라져서 굳이 시내에 가지 않아도 됐지. 전에 같았으면 너는 꽤나 좋아했을 거야. 시내에 가느라 시간을 쓰는 걸 무척 싫어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엄마가 집에 있어도 너를 위해 시내로 가게 돼. 방과 후 수업 때문에 늦게 시내로 가도, 출발하는 시간이 이미 캄캄해도, 비가 꽤나 오는데도 말이지. 도서관에서 그렇게 한참을 책을 고르고는 완전히 캄캄해진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지.
너만을 위해 시내에 가게 되었지만, 엄마와 아빠는 기꺼이 함께 갈 수 있었어. 도서관에서 책을 둘러보고 빌리는 것을 네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기도 하고, 그렇게 맘에 드는 책을 빌리고는, 'Life is good, 삶은 좋구나' 하며 콧노래를 부르는 것이 엄마 아빠의 최고 기쁨이기 때문이야.
오늘도 잔뜩 빌린 책들과, 시내 갈 때마다 사 먹는 치즈 피자, 그리고 너의 콧노래가 역시 엄마 아빠가 사는 낙이라는 걸 절실히 느끼는구나.
Life is good. 엄마와 아빠도 그래.
11월 26일
아빠가 만약에 이번에 대학원에 붙게 되면 아빠는 2000년 대에 학사, 2010년 대에 석사, 2020년 대에 박사과정을 밟는 사람이 돼. 그러고 보니 엄마도 그렇기는 하지. 아빠는 심지어 제때 졸업하더라도 2030년에 졸업하는 일정이네. 이제는 정말 평생 공부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어.
아빠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어. 그때 당시의 아빠의 담임 선생님은 아빠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지. 1년만 참고 공부하면, 그래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평생 편하게 살고, 대학 가서 실컷 놀 수 있다고. 실제로 당시에는 분위기가 그렇기도 했지. 그런데 그때 아빠가 그랬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금 공부할 양, 지금 놀 양이 있고, 나이가 들면 또 그때 공부하고 놀아야 할 양이 있을 거라고. 지금 공부할 만큼, 지금 놀만큼 놀고, 또 커서도 그만큼 공부하고 그만큼 놀겠다고.
의도하진 않았는데, 그때 했던 아빠의 말이 예언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정말 평생 공부하고 있네. 사실 선생님의 말도 맞고, 아빠의 말도 맞는 것 같아. 그때에 맞게 공부해야 할 것들이 있지. 그래서 그때에 열심히 하면 편한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때에만 공부하면 끝나는 건 확실히 아냐. 그러니까 그때에 최선을 다하되, 놓쳤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고 다시 도전할 용기를 가지렴. 때를 따라 즐기고 놀 것들도 놓치지 말고 말이지.
11월 30일
긴 추수감사절 연휴가 지나가고 있어. 새로운 학년의 처음 긴 휴식이었지. 학기가 시작하고 지쳐갔던 몸과 마음을 한 번 추스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 너도 잘 쉬고, 나름대로 휴식을 잘 취한 것 같아 보여.
우리 가족은 여러 번의 이주와 이사로 계속 이어지는 가족 전통이 별로 없지. 엄마와 아빠는 특히 큰 의미를 알 수 없는 허례허식을 워낙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우리 세 가족의 의미 있는 전통을 잘 만들어가고 싶었는데 이렇다 할 전동은 만들지 못한 게 사실이야.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론 네가 미안하기도 해.
뭐가 미안하냐고?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그런 가족의 전통들이 추억이기 마련이거든. 우리 가족만의 추억이 될만한 그런 전통이 있나 싶어서. 이제 너도 사춘기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이런 전통을 만들기가 더더욱 어려워질 텐데, 미안하고 속상하고 그러네.
그래도 올해는 추수감사절 당일에 제이 아저씨네서 제대로 된 추수감사절 정찬도 먹고, 많은 사람이 함께 하는 경험을 했어.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많이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더라고. 사람이 모이고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는 건 즐거운 일이라는 걸 네가 알았으면 좋겠어. 팬데믹 세대들에겐 그게 중요한 것 같아.
또 날씨가 추워지네. 혹독한 피츠버그의 겨울을 견뎌야 할 시간이야. 따뜻하게 지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