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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부장 Mar 27. 2022

늘 부장의 직장 일기

술 못 먹는 게 죄

2015년 봄.

회사 내에서 여러 부서가 모여 체육 행사를 했다. 대략 100여 명쯤 되는 인원이었다. 

오전엔 업무를 보고 오후에 치러지는 행사라 다소 바쁘게 행사가 진행이 되었다. 단체 행사 때 늘 하는 축구 경기, 줄다리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품 추첨. 여기까진 좋았다. 업무 시간을 빼어 이렇게 하니 업무 스트레스에서 잠깐은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진행이 되었으면 참석한 대부분 사람들은 좋아했을 텐데. 그러나 주최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행사를 지시했던 최고 우두머리인 부사장의 생각이 그렇게 쉽게 끝나게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예상 대로였다. 오늘 행사를 하느라 다들 고생했으니 이제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모르는 회사 외부 사람들이 들으면 부사장이 역시 배포 독이네 저 많은 인원들을 저녁 식사까지 책임지는 모습이 참 보기 좋구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부사장이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런 자리에서 본인이 부하 직원에게 본인의 위세를 과시하고 한편으론 부하 직원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직원들은 행사를 마치고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지만 단체 생활에서 나만 빠질 수 없는 상황이라 거의 모든 이가 저녁 식사에 참석했다. 저녁 식사만 하고 헤어지면 더 바랄 게 없지만 역시 그렇지 못함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저녁식사가 나오기 전에 반주를 해야 한다며 소주를 시켰다. 술 좋아하는 부사장은 거의 100여 병이 즐비하게 늘어선 소주를 보고 흐뭇해했다. 부사장의 지시에 의해 행사를 진행한 직원은 오늘 행사를 위해 힘써 주신 부사장을 위한 건배사를 지속적으로 제안했다. 이 와중에 평소 술을 잘하지 못하는 직원들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잔, 두 잔 했다.     


우스갯소리로 이 부사장은 술 잘 마셔서 출세했다고 할 정도로 술을 잘 마셨다. 

부사장은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내어 건배사를 시켰다. 술자리에서 부사장에게 눈에 잘 띄면 진급에도 유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술 잘 마시는 사람과 못 마시는 사람을 차별화할 정도였다. 혹시라도 건배 제의에 걸릴 까 봐 필자는 그 술자리에서 가장 구석에 앉아서 건배 제의할 때마다 물만 들이 켰다. 술을 못 마시지만 하는 시늉은 해야 하는 상황이라 소주잔에 물을 채워서 몇 잔을 건배했다.  

   


소주 주량이 도대체 몇 병인지 모를 부사장은 술도 잘 취하지 않았다. 100여 명 건배를 하는 그 와중에도 누가 술을 마시고 누가 마시지 않는지를 유심히 살폈던 것이다. 열몇 차례의 건배에서 어느 정도 막판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부사장이 건배를 하자고 했다. 이때 갑자기 식당 맨 구석에 앉아 있던 필자를 지목했다. 그리고 자기 곁으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선 필자에게 대뜸 내가 유심히 봤는데 너는 술은 안 마시고 계속 물만 마셨다고 했다. 아니 술자리에서 술만 마시라는 법이 있는가? 몸이 안 좋으면 술이 아니고 물을 마실 수도 있지 않은가?  하여튼 부사장은 술자리에서 물만 마셨다고 벌칙으로 필자에게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 주면서 건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솔직한 심정은 맥주잔에 따라준 그 술을 부사장의 면상에 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뒷일을 생각하면 그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보스의 다소 비합리적인 지시라 하더라고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부사장의 지시에 의해 할 수 없이 생글거리는 가식적인 얼굴로 부사장님과 우리 모두의 목표 달성을 위해라는 말로 힘차게 건배사를 하고 단숨에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그다음엔 기억이 나지 않았다.     


2022년 지금의 회사 분위기에선 이렇게 했다가는 그 부사장은 꼰대의 최고봉으로 분류되어 조직에서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2015년 당시만 해도 상사의 강압적이거나 불합리한 지시에 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혹시 위의 글을 보고 네가 마시기 싫은 술을 마시기 싫다고 하면 되지 왜 억지로 마시느냐고 할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그런 사람은 회사라는 조직에서 한 하루라도 몸담아 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술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 좋은 회사로 바뀌어 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29년 차 회사원은 이제 안도의 한숨을 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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