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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증후군

삼십 살이 되었다

by 양해일 Mar 23. 2025
파리 증후군(Paris syndrome): 파리를 방문한 사람이 도시가 예상했던 것만큼 미학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하는 현상



한국을 벗어나고 싶다고 종종 생각한다. 현재 근무지는 선릉. 한 번쯤은 들어본 기업의 고층 빌딩을 지나 오르막을 올라 응달에 위치한 회사로 간다. 매일 반복하는 일상. 그렇게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도 강남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지. 봄이다. 아직도 패딩을 벗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의외로 까마귀를 보기 쉽다. 문득 나는 완전히 낯선 곳을 상상한다.


보통 나는 일본으로 떠났다. 문화가 익숙하고 언어가 비슷해서 만만했던 걸까? 3월의 짧은 연휴. 나는 홍콩에 가기로 했다. 작은 비행기는 자주 난기류에 휘말렸다.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기대도, 계획도. 중경삼림 OST라도 들어볼까. 넷플릭스에 타락천사를 받아 놓고선 잊어버렸다.


입국심사서는 쓰지 않았다. 한밤중 도착했고 여기는 한국보다 한 시간이 빨랐다. 2층 버스를 타고 완차이까지 이동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어둠과 빨강. 해독이 불가한 문자가 즐비한 도시. 늙은 여자의 목소리가 헤드폰을 뚫고 들어왔다.


TV에 나온 식당에 들렀다. 포장하여 호텔에서 먹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거기선 영어도, 번역기도 통하지 않았고. 얼굴을 굳히고 묻는 아저씨 앞에서 나는 머쓱하게 웃고 나와버렸다.


하버뷰가 보인다는 방에서는 검은 안개를 목격할 수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야경은 운영하지 않았다. 근처에 편의점도 없어 맥주를 사지 못했다. 그래도 이대로 잠들고 싶지 않았는데. 한국을 떠나도 출퇴근을 기억하는 몸은 이미 수면 상태에 돌입한 상태. 나는 급하게 푸드 판다 앱을 다운받았다. 아까 획득하지 못한 돼지고기 덮밥을 주문했다. 30분이 채 되지 않아 도착했다. 간장 조림에서는 평소 맡아본 적 없는 향이 났다. 돼지 냄새가 섞여 차마 맛있다고 말할 수 없는 맛이었다. 사무실에서부터 시작한 기침은 여전했고. 서서히 열이 올랐다.


최근 구룡성채 영화를 봤다. 공원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지만. 내가 보고 싶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예상 보다 일찍 눈을 뜬 나는 청킹맨션으로 향했다. 이곳은 습도로 가득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났다. 지상에서는 어제 먹은 돼지고기 덮밥 냄새가 났다. 안개에 위치한 주거 단지를 처음 본 소감은... 기대와는 달랐다. 물론 사진과 영상과 비교했을 때 똑같았다. 기억나는 것을 굳이 꼽아보자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과 굳은 얼굴로 담배를 피우는 현지인. 나는 그동안 가상의 공간에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던 것에 묘한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며 건물을 두어 바퀴를 돌다가 떠났다. 커피를 사고 아울렛으로 이동했다. 상점을 구경하다가 밥을 먹고 담배를 피워야지.  하지만 이곳은 홍콩. 일본과 다르게 실내 흡연은 금지됐다. 심지어 너무 일찍 가서 열려 있는 가게가 거의 없을 뿐더러 한국에서 전부 볼 수 있는 브랜드들이다. 원래는 베이프를 구경하고 싶기도 했지만. 내 재정 상태로는 살 수 없는 물건들이다.


나는 계속 걷고 걸었다. 모든 쓰레기통에는 재떨이가 있었다. 편의점에서 새로 산 라이터는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재미가 없다. 감흥이 없다. 감기를 느낀다. 금방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으로 딤섬을 주문했다. 블로그에서 맛집이라 하던데. 쿠팡에서 시킨 새우 하가우와 똑같은 맛이 났다. 맥주를 많이 마셨다. 창밖으로 날이 갰다. 공사장과 강. 그 너머의 빌딩들. 어렸을 때 가족들과 저 야경을 보고 무척 즐거워했다.


전면 카메라로 영상을 찍었다. 나는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존댓말 했다. 인플루언서라도 된 것처럼 더듬더듬 말을 잇다가 취기를 핑계로 한탄을 시작했다. 나는 지금 나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것은 나의 인생이 아니에요. 이렇게 안정적인 직장인이 되는 것은 우리 엄마와 아빠가 바란 일이었죠. 나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직접 이력서를 넣고 제 발로 면접장에 찾아간 건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삼십 살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사실 나의 막연한 미래 상상은 늘 20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등단은 했겠지? 그런 종류의 희미하고 들뜨는 낙관. 실제의 나는 여전히 편의점에서 담배를 살 때 민증을 요구받고, 오버 사이즈 후드티를 즐겨 입고, 화장을 잘 하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정신 연령이 열아홉에서 성장을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취해서일까... 너무 부정적인 것에 몰두하고 있다. 나는 변명하듯 그럼에도 감사한 것들을 끄집어본다. 경기 불황에도 취직을 하고 벌써 6개월이 넘은 것... 조만간 서울로 독립을 하는 것... 르라보 핸드크림 정도는 선뜻 살 수 있는 것... 이렇게 내 돈으로 여행을 온 것...


아직도 오후였다. 나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음악은 듣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을 올랐다. 사진도 찍지 않았다. 에그 타르트를 먹지 않았다. 대신 한국인들과 함께 줄을 서서 제니 쿠키를 왕창 샀다. 구글맵을 따라 골목길에 들어갔다. 어떤 무리를 만났다.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그들은 필리핀에서 온 헬퍼였다. 7일 중 6일은 육아와 집안일을 하다가 일요일이 되어서야 그런 식으로 휴식을 취한다고 했다. 나는 압도적인 에너지에 겁을 먹고 서둘러 걸었다.


거리는 어딘가 익숙한 인상이었다. 그것은 내가 왕가위 영화를 보면서 상상한 것과는 달랐다. 보다 스모그가 깔린 베이징과 비슷했고, 돈키호테와 세븐일레븐이 있는 도쿄 어딘가에 온 듯 했지만 런던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여기는 홍콩이니까. 나는 다시 이곳에 오지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저녁은 맥도날드로 해결했다. 치킨 패티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나는 모조리 먹어 치웠다. 새벽. 선잠을 자고 택시를 타고 공항에 갔다. 내일 나는 출근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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