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우렁각시 13화

일곱 계단 위의 감탄

김치의 마법

by 윤혜경


요즘 우리 부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시작되어 길게 병치레를 해온 큰 딸의 보호자로 사이좋게 식사시간을 거의 함께 하며, 저장 채소 요리를 먹다가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는 일이 잦다.


그 선조들이 긴 겨울을 맞은 다람쥐의 도토리 저장소처럼 땅속에 묻어서 저장하는 포기배추를 비롯한 김장김치를 알려준 지혜에 대해 특히 탄복 중이다. 이게 급한 내리막길에 선 사람들의 과거지향적 성향 탓일지도...






*조상의 지혜가 가득한 배추김치




첫 번째 계단 위의 감탄

무엇보다도 솜씨가 짧아 초기 작품의 맛이 싱겁거나 짜거나 간에 후속으로 맛의 교정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 김치의 맛이 싱거우면 맑은 액체 젓갈을 한 두 수저 둘러주면 되고, 맛이 지나치게 짜면 무를 큼직 큼직 썰어서 섞박지 (국립국어원: 배추와 무를 섞어 만드는 의미의 단어) 만들듯 배춧잎 사이에 슬슬 끼워주면 짠맛이 슴슴해진다.


그래서 난 구태여 성공한 절임배추를 구입하지 않는다. 최대 3 포기의 김장 김치 담그기이므로 작은 그릇을 여럿 동원하여 집에서 직접 소금에 절인다. 3 포기의 김치는 약 12kg의 완성품이 되므로 4쪽을 내어 켜켜이 소금으로 절이려면 옛 세숫대야 크기의 스텐 양푼들이 여러 개 동원된다. 일단 맛보다는 <위생적으로 청결하게>에 중점 두기이다.


두 번째 계단 위의 감탄

포기배추김치를 만든 직후의 맛이 떨떠름할지라도, 숙성이 된 후에는 한결같이 맛이 그럴듯한 김치로 변신하는 점이다. 매번 마법을 경험 중이다. 눈대중으로 재료 양을 조절하니 담글 때마다 맛이 다양하지만 맛이 좋은 편이다. 다소 섭섭한 맛으로 시작해도 일단 발효로 숙성과정을 거치면 누구와도 같이 먹고 싶게 변신하여 맛이 좋아진다.


세 번째 계단 위의 감탄

김치의 다양한 활용 방식이다. 배추 시기부터 겉잎은 배추 된장국, 우거지 김칫국이 가능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그동안 시원스레 쓰레기로 내보냈던 배추 겉잎들을 이제는 수집하여 살짝 데쳐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으면 훌륭한 우거짓국 재료가 된다.


날것의 김치 외에도 김치 부침, 멸치와 다시마를 함께 넣고 끓인 김칫국, 돼지김치찌개, 김치 광고 프로그램에 꼭 등장하는 먹음직스러운 빨간 양념의 포기 배춧잎과 삼겹살 구이, 김치 김밥, 송송 잘게 썰어 넣은 김치에 고운 초록 오이채와 참기름 한 스푼, 그리고 갓 구워서 바삭바삭한 김 가루와 참깨로 마무리한 김치 비빔밥. 돼지수육과 홍어회를 김치에 둥글게 말아먹는 삼합, 셀 수 없을 만큼 끝없는 김치의 활용방식이 요리에 특기가 없는 나도 약간 선선한 나이가 되니 궁금해진다.


네 번째 계단 위의 감탄

다양한 김치 종류이다. 요즘은 배추김치, 무김치, 총각무김치, 갓김치, 열무김치, 물김치, 동치미 김치, 백김치, 고들빼기김치, 파김치, 오이소박이김치에 더해서 고추김치, 마늘김치, 민들레김치, 참외김치, 사과김치, 감김치까지 끝없이 김치종류가 늘어나는 형국이다. 일단 식용 야채, 과일, 꽃 재료만 있으면 연구자들이 김치로 변신시키는 중인가 보다.


다섯 번째 계단 위의 감탄

재료가 합해지면 모두 잘 어우러져서 각각의 재료보다 맛이 배가되는 점이다. 배추도 무도 눈물을 쏙 빼게 매운 양파와 마늘, 생강, 열무, 생선, 육류, 파, 갓, 고추, 청강, 당근, 다시마, 배, 사과즙, 고린내 나는 젓갈까지 어쩜 터무니없이 어우러져서 환상의 맛으로 탄생되는지 이걸 수많은 시도 끝에 만들어냈을 선조들의 희생과 지혜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북어 머리 삶은 야채육수나 청각 해초, 찹쌀풀, 보리밥들이 빠져도 미셀오바마처럼 요리저리 야채와 고춧가루 적당량의 생강과 마늘을 손가락으로 섞으면 김치가 되니까. 소금으로 간 맞추어 발효만 시키면 맛이 비범해지는 쉬운 김치 만들기는 쌀밥과 어울려 비만을 막아준다니 매력이 배가된다.


부재료도 곶감, 배, 사과, 생선, 다시마, 굴, 소고기, 돼지고기, 갈치, 조기, 오징어, 크고 작은 멸치 등 김치 맛과 연결하기 어려운 재료들이 뜻밖에 김치의 맛을 풍요롭게 돕는다. 그리하여 남은 채소는 여러 재료들과 섞여 고춧가루로 곱게 색을 내거나 말갛게 국물을 부어주면 거의 별미 김치로의 변신이 가능해서 누구나 창의적인 반찬 만들기가 가능하다.


여섯 번째 계단 위의 감탄

저장성이다. 세상에 어떤 음식이 담그고 2~3년이 지나도 오묘한 맛을 즐기며 먹을 수 있을까? 발효치즈나 여러 차례의 증류를 통해서 제작한다는 수년 된 마른 찻잎이나 위스키와 같은 술이 아닌 바에 배추 포기김치처럼 오래 저장하고 먹을 수 있는, 수분 가득한 반찬이 또 있을까 싶다.


겨울 김장을 가득 선물해 주었던 손맛 좋은 동서가 직장생활 중이면서도 지난봄에 직접 담근 김치 10kg를 보내오고, 같은 날 유명 요리연구가의 배추김치까지 한꺼번에 도착하여 당황했던 적이 있다. 고작 2~3 포기를 넘겨본 적이 없는 우리 집에선 배추김치 풍년을 맞아 냉장고와 냉동실 겸 사용하는 김치냉장고의 여기저기에 빈 공간을 만들어 겨우 완전한 보관에 성공했다. 비상시에는 김치냉장고도 냉장고도 공간이 늘어나는 재주가 있나 보다.


그리고 동화 마무리처럼 나와 남편은 김치를 요리조리 들여다보며 오래오래 행복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점점 더 맛있어졌다. 원래는 우리 집은 김치 소비가 참으로 적었는데 큰아이로 인해 모두 집밥족이 되면서 김치의 소중함과 맛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환자를 위한 부작용 적은 반찬이다. 거의 매일 매스껍고 울렁거리는 입덧 닮은 증세로 고생해 온 딸과 나는 미리 프라이팬을 이용해서 만들어둔 바싹 누룽지에 물을 부어 고소하게 끓인, 물 누룽지와 김치를 즐긴다. 저녁식사로 따끈하고 누르스름한 물 누룽지와 김치, 오이, 베란다 화분에 키운 상추 몇 잎, 두어 쪽의 로스구이는 배를 편안하게 해 주어 딸은 복용약이 많은 밤에도 수면제 없이 깊은 잠을 잘 수 있다.


일곱 번째 계단 위의 감탄

환상적인 적응력이다. 뽀오얀 흰색과 초록 잎사귀의 배추를 붉은 색감의 고춧가루로 물들이고 생선 젓갈로 간을 맞춘 배추김치는 흰쌀밥, 잡곡밥, 죽, 떡, 라면, 만두, 각종 국, 종류별 육류, 여러 가지 생선, 나물들, 스파게티, 수프, 심지어 피자, 햄버거, 라자니아와도 낯가림 없이 금세 잘 어울린다. 무슨 음식이 아무 하고나 고유의 맛을 간직하며 척척 어울려서 맛을 내는지... 배추김치의 동서양 음식과의 적응력은 가히 환상적이다.


젊은 시절엔 마늘냄새에 고개를 젓는 해외 손님들을 의식해서 스테이크, 스파게티, 피자, 햄버거, 소시지, 구운 감자 등을 즐기던 남편은 퇴직 후 집밥을 먹으면서 김치에 늦게 매력을 빠져서 담기 어려운 포기김치를 한여름에도 좋아한다. 비싸게 구는 아내의 손 빌림이 요원해 보였던 남편은 이번엔 직접 소금물에 생배추 절이기부터 배추김치 완성까지 풀코스를 완성한 거다. 기쁨이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내미는 그의 김치는 일단 맛이 그럴듯했다, 놀랍게도.


레시피의 위력인가?


평소에는 남편이 간단하고 재밌게 설명해 주는 백 선생님 요리 따라쟁이였는데, 요즘 말씨가 예쁜 여성 요리연구가의 레시피를 힐끔거리더니 오늘은 급기야 말씨 고운 요리 연구가식 배추김치를 완성한 거다.


겁 없이 한숨에 김치 만들기에 덤벼든 그의 첫 작품이 성공작인 건 주부역사가 긴 내겐 다소 당황스러운 일이다. 김치 맛이 일관성이 없어 늘 아슬아슬한 맘으로 김치를 담그는 38년 경력의 주부인 나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포기배추김치 담그기를 <별거 아니네> 표정으로 배추 포기 절굼부터 배추김치 버무림까지 웃으며 가볍게 완성한 우렁각시에게 진심으로 감탄 중이다.


다음 생에서는 결혼을 안 할 요량이니 안 만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나는 남자로 그이는 여자로'가 어울릴지도...


그리고 2주간 숙성을 거친 후에는 내 눈에 과하다 싶게 들어간 굵은 무채가 특징인 남편김치는 오이와 배를 굵게 썰어 넣어 시원한 맛을 내는 내 김치보다 더 시원하고 더 맛있었다. 영락없는 주식 초보의 성공기처럼 무모하고 성공적인 도전의 일단 성공이다. 이제 김치 담그기도 살그머니 미루기로~**


요즘은 맛 좋은 배추김치 덕분에 새삼스레 극한의 어려움들을 견뎌온 선조들의 음식 지혜와 솜씨에 감탄하는 일이 잦다. 오늘보다 훨씬 어렵고 척박한 환경에서 자식들의 교육에 헌신한 부모님을 포함하여 선조들의 고단함 무릅쓰기 덕분에 평온과 풍요를 누리면서도 늘 눈빛을 멀리, 그리고 높이 두고 욕심을 부려온 후손 세대임에 반성중이다. 반성하는 후손의 자세로 플라스틱 물품 줄이기와 생활 쓰레기 줄이기, 물건은 최소한만 구매하기를 실천하는 역할을 맡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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