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의 이별

많이 사랑해

by 윤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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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뒷산 산책을 좋아하던 랄프


*추운 겨울날, 랄프는


이별을 준비하자는 전화를 받고 한걸음에 달려온 작은 누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늘어져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랄프를 품에 안고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링거를 맞혔다. 몇 시간이라도 더 눈 맞춤의 시간을 벌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랄프는 기적처럼 일어서서 걸음을 걸었다. 링거를 매단 채 온 힘을 다해서 작은 누나와 함께 거실을 이리저리 걸었다.


비척거리는 랄프는 작은 누나와 계속 걷고 싶어 했다. 누나는 아장거리는 아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엄마처럼 링거를 높이 들고 랄프 뒤를 따르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랄프는 평화로운 표정으로 거실에 길게 누운 채, 굳어있었다.



누나네 아빠는 랄프의 코와 귀, 그리고 궁둥이를 솜으로 막아서 더 이상 분비물이 흘러나오지 않게 해 주었다. 입 주변의 침도 물티슈로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작은 누나와 큰 누나는 랄프의 털을 곱게 빗질해주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엄마는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아빠랑 누나들은 눈을 감은 랄프의 털을 단정하게 빗질을 했다. 그러고 나서, 마치 아기처럼 랄프의 몸을 무릎 담요로 조심해서 감싸주었다.


작은누나가 랄프를 품에 꼬옥 안고, 방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는 엄마는 빼고, 아빠랑 큰누나가 함께 전화로 예약해 둔 경기도의 반려견 화장장에 갔다.


랄프가 화장로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누나네 가족들은 랄프와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발자욱' 시(poem)의 주인공이 자신이 지나온 발자욱을 뒤돌아보았듯이...


랄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작은 누나와 형아가 데려간 수영장 '보드 위의 겁쟁이 랄프' 에피소드,

반려견 카페에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누나 다리 뒤에 숨어서 소심하게 내다보던 랄프,

아파트 뒤뜰 산책길의 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왕복 달리기를 즐기던 랄프,

뒷 베란다에 핏물을 빼기 위해 스텐볼에 담가 둔 LA갈비를 몰래 물고 나오다가 들킨 랄프의 화등잔이 된 눈...


'병원을 싫어하는 랄프가 동물병원 입구에서 갑자기 차도로 도망간 일,

그리고 랄프를 뒤따라 달려간 큰누나가 자동차에 치일 뻔했던 일...

일상이 된 랄프의 길고 예쁜 귀의 염증치료,

터줏대감 요크셔 '럭키'의 텃세를 묵묵히 견디며 럭키의 눈치를 살피곤 하던 랄프.

베란다의 노오란 만천홍 화분을 딛고 서서 화분 꽃대가 부러지며 화분이 엎어져 흙투성이가 된 랄프의 놀란 두 눈,

베란다 밖 유리창 너머에 사람들이 오고 가는 풍경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서 있던 랄프...


어느 날 간식 쟁취로 갑자기 싸움이 붙어서 힘센 순둥이 랄프가 노쇄한 럭키를 입에 물고 공중에 들어 올려 뒤흔든 일,

뜯어말려 가벼운 상처로 마무리되었지만 벌을 받고 많이 억울했을 랄프...

원인 제공자인 럭키는 면제되고, 랄프만 엄마에게 호되게 벌 받은 일.

베란다에 소변을 하고 들어오면서 괜스레 미안해하던 랄프,

지나는 사람들의 관심 표명에 늘 당황하던 랄프,

그래도 금세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리던...


가끔은 신호등 기다리다가 앞사람의 정강이에 기다란 입을 대며 킁킁거려서 그 사람의 '학다리'를 시도하던 랄프, 우린 덕분에 고개를 숙이며 '미안합니다'를 건네고...


랄프야, 네 털은 정말 예뻤어. 무엇보다도 너의 든든한 자태가 우리에게 늘 위로가 되었어. 고맙고 많이 사랑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마음껏 짖으며 뛰어놀 수 있는 곳에서 행복하길...


자그마한 도자기 용기에 한약 봉지처럼 정사각형의 하이얀 종이로 포장된 랄프의 재가 담겨 있었다. 겨우 한 줌의 재... 랄프의 고단한 시간이 마무리되었다. 누나네 아빠랑 큰누나와 작은 누나는 집으로 오며 말은 잠기고 눈물만 그렁그렁했다.


늘 든든했던 , 그리고 털 색깔이 참 예뻤던 랄프의 재는 집에서 작은 화분 위에 한 스푼씩 뿌려졌다. 그리고 달리기를 좋아했던 랄프를 위해 작은 누나 집 앞 공원 산책로의 작은 나무 발아래에 한 스푼 올려주었다.


이후 누나네 가족은 수영장에서, 애견카페에서, 강변에서 랄프의 행복했던 시간들은 잊고 오직 미안함만 남아서 길에서 어쩌다 마주친 셀티를 보면 가슴이 싸아하다. 그동안 차마 열어보지 못했던 랄프와의 시간들을 7년 여가 지나서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랄프야, 누나 가족들은 랄프 많이 사랑해... 그곳에선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짖고 달려 다니며 행복하길~'



*저희 가족은 잦은 국내외 이사로 인한 주거지 변동으로 적응기간동안 여러 어려움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시기들에 두 아이의 의사소통 대상으로서의 반려견의 역할은 실로 위대했습니다. 특히 낯선 환경에서 의사소통에 필요한 언어습득이 전혀 안되어 있는 3살 5살이던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사정에 의한 잦은 해외 이주는 부담이 컸습니다. 모국과 타국의 문화충격을 온 몸으로 경험하며 두 아이들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두 아이들과 의사소통을 이어온 시드니에서 입양한 요크셔테리어 럭키와 서울에서 입양한 랄프에 대한 고마움을 남기고자 반려견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소소한 글쓰기를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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