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책 출판작업을 위한 원고정리를 하는데 집중력 모음이 필요하다. 강의나 모임 등에서 집중력을 위해 노래와 손동작을 넣은 짧은 길이의 소근육 운동처럼 금세 집중력을 높이는 뭔가가... TV로 휴식시간에 뉴스나 드라마를 볼 때 할 수 있는 손놀이 같은.
친정어머니는 평생 부지런하셨다. 직장생활로 퇴근 후 다섯의 자식과 다감하지만 까탈스러운 입맛의 장남인 남편, 시부모님과 함께 사시면서 겨우 마련된 짧은 휴식시간에도 늘 뜨개질을 해서 조끼나 목 높은 스웨터, 겨울 치마 속에 털 바지 등을 긴 대바늘로 예쁘게 짜서 가족들을 입히셨다. 친정어머니의 마법의 손에 비하면 내 손재주는 막막하다.
며칠 전 부엌 수세미가 낡은 상태인 게 눈에 들어왔다. 수세미가 낡으니 부엌도 우중충해 보인다. 공산품으로 구입해 쓰다가 작년부터는 선물 받은 실 뜨게 수세미들이 있어서 그동안 사용해 왔다.
집안 환경 정리에 손을 놓은 지 몇 해째인가? 학교 근무시절에도 교실 환경이 학생들의 학습동기 유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집안 환경 정리는 업무가 바쁘다는 이유로 침대 위, 화장실, 부엌만 청결하게 한다. 대신 옆지기와 큰 딸이 청소기를 돌리고 나는 밀걸레를 사용한다. 물건 위치 바꿈은 꿈도 못 꾼다.
침대 이부자리를 계절에 맞춰 색상을 교체하고 베갯잇과 쿠션을 자주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방의 분위기가 새롭다. 가끔 커튼까지 세탁하면 마음도 개운해진다.
10년이 훌쩍 넘어 낡아진 수전과 세제통을 얼마 전에 교체했다. 집을 고칠 때 가장 질 좋다는 스테인리스 수전을 선택했는데 수전 머리 부분이 벗겨지다니 난감했다. 기술이 좋아 코팅 처리한 제품이었나 보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작은 딸이 추천한 수전 모델로 교체하고 나니 마음까지 깔끔해졌다.
그러고 보니 낡은 수세미를 바꿔야겠다. 쿠* 앱에 들어가서 수세미실을 검색하여 주문했다. 받아서 보니 온통 반짝거린다. 그동안 초록 노랑 스펀지나 수세미과 식물에서 만들어지는 천연 수세미는 열탕 소독했는데... 이번 수세미용 뜨개실은 비닐 반짝이가 섞여서 끓인 물 소독은 어려울 듯하다. 식초 소독을 해야겠다.
두 딸 대학시절 사둔 코바늘과 긴 대바늘을 바느질 상자와 옷장 서랍에서 찾아냈다. 옛 기억을 더듬어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코 뜨기를 성공했다.
둥근 형태의 수세미는 코바늘이 더 낫겠다. 처음엔 단색으로 완성했다. 요령이 생기니 세 코씩 뛰어 뜨기를 해보았다. 구멍이 뻥뻥 뚫려서 건조하기가 더 수월한 수세미가 되었다.
요즘은 일처리에 집중하는 시간이 짧다. 마치 용량 줄어든 컴퓨터처럼 자꾸 생각이 얼음 된다. 그럴 땐 머릿속 환기를 위한 휴식을 위해 안방에서 뉴스를 본다. 멀거니 두 손 놓고 보기는 어색하다. 건조된 빨래를 개키거나 서랍을 한 칸씩 생각날 때마다 정돈하면 마음도 정갈해진다.
강의 PPT 준비를 하다가 쉬면서 내일 1년 만에 만나는 시드니 시절 지인들을 위해 부엌수세미를 떠볼 생각이 들었다. 10가지 색상이라 색깔을 배합하는 재미가 솔솔 하다.
빨간 철쭉꽃 색과 라일락의 연보라색, 연두색과 주황색, 파란색과 연노랑색을 골라 배합해 보고 잘 어울려 보이는 순서도 메기며 큰딸과 나는 침대 위에 앉아 깔깔댔다.
4인이니 내 몫까지 4개를 떠서 '고르세요'
할 생각에 들뜬다. 컵 닦이용으로 소형 수세미도 추가하여 1인당 2개씩 총 8개를 짜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허리가 아파서 침대 옆 접이 의자로 옮겨 앉아 수세미 뜨기를 시작해서 3시간이나 뉴스를 시청하게 되었다. 막상 뜨개질을 해놓으니 배합 색이 덜 어울려 보였다. 간단하니 부담 없이 "다시"를 반복했다. 처음 계획했던 4개에서 어느덧 15개가 만들어져 있다.
혹시 작은 딸도 좋아할까? 워낙 깔끔하고 생각 깊은 아이라 좋아할지 싫어할지 모르겠다.
반짝거리는 비닐조각이 실에 함께 매달려 있는 게 마음에 걸린다. 일단 손주가 좋아하는 색상을 상상하며 나름 의미를 붙여 로열컬러로 연보라와 보랏빛으로 섞어 짠 것을 골랐다. 부엌이 시원해 보이게 파란색과 연한 살색이 섞인 건 어떨까? 아이가 좋아하게 작은 수세미도 골랐다. 이런 원색 조합의 즐거움이 있다니. 온통 파스텔 톤만 고르다가 원색의 매력에 푸욱 빠졌다.
다음날 이촌동에서 지인들을 만났다. 지인들은 하나같이 자식들을 건강하고 예쁘게 잘 키웠다. 우린 딸만 키운 엄마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 호주 한글학교에서 만난 사이이다.
경영전문가로 딸을 키우고 이제 친정어머니의 가정 요양 돌봄을 책임지고 있는 마음 고운 나인이 엄마, 세 딸을 의사와 변호사, 전문가로 키우고 홀가분해져서 환경 돌보미와 심리 돌봄 자원봉사 대표인 하영이 엄마, 두 딸을 전문 법조인으로 키우고 이제 손주 돌봄 중인 연주엄마와 베트남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하영이 엄마에게 뜨개질 수세미 선물을 살짝 꺼내 보여주며
"선물로 준비했는데" 하니
"그게 미세플라스틱 주범이에요. 방송에도 나왔는데... 내놓지 말아요." 했다.
'어?'
환경돌보미 지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했다. 2년여 동안 TV 뉴스를 안 듣고 필요한 내용만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수준으로 살다 보니 생활뉴스를 놓쳤나 보다. 덜렁이는 나에 비해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녀들에게 뜨게 수세미를 선물할 용기가 쫄아들었다.
미세플라스틱이 떠오르니 눈에 넣는 인공눈물까지도 한 방울 떨어뜨린 뒤 넣으라는 처방을 받는 요즘이다. 우리 사회는 미세플라스틱 공격에 대한 공포심이 한껏 달아올라 있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그래도 새벽까지 정성 담아 짠 색색 수세미를 건네지 못해 좀 아쉬웠다.
지난밤 지인들을 떠올리며 수세미를 코바늘로 뜨개질한 시간은 참 행복했다. 즐거운 안부 모임이 끝나고 돌아온 내 가방엔 뜨개질 수세미 8개가 그대로 담겨있었다. 침대 위에 꺼내 놓으니 큰딸의 눈이 커졌다. 다시 들고 온 사연을 말하니 큰딸이 말했다.
"엄마, 미세플라스틱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조심해야 되긴 하지만... 우리가 써요."
피로를 씻고 나오니 갑자기 늦은 시간 대학 친구들 단톡방이 들썩거렸다. 유럽 가족여행에 이어 딸과 모녀가 일본을 다녀온다는 친구의 소식이다.
귀국 다음날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에 '만나자'는 카톡 알리미였다. 일정은 얼마 전 대략 정했었다. 장소는 여행을 다녀온 친구의 고단함을 고려해서 딸이 살고 있는 잠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점심 먹고 근처의 갤러리 들르기' 정도인데 이 나이에도 들뜬다. 아무리 바빠도 6개월 1회 정겨운 친구 모임은 내게 숨 쉬는 활력소가 된다.
"나, 공항에 도착했어. 내일 어디서 볼까?"
"잠실 근처 어디가 좋아?"
"뭐 먹고 싶어?"
"미안해. 나는 어려울 듯하네. 어제 시어머님께서 요양원에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장례 절차 중이야."
친구네의 갑작스러운 애사로 인해 곧바로 '맛 집' 운운 메시지가 멈췄다. 그리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로 이어졌다.
1:1로 전화를 하고 필요한 의논들을 했다. 다행히 요양원에 오래 계신 친구의 시어머님께서는 노환 외엔 별다른 병환 없이 자는 듯 떠나셨다고 한다. 친정 부모님을 이미 여읜 친구는 시어머님과 참 따뜻한 고부 사이였다. 조카인 수녀님이 계신 가톨릭 요양원에서 평안히 계실 수 있어 감사했다고.
산다는 게 참...
한 치 앞도 못 보고 '즐거웠다', '가라앉았다' 한다. 오늘 하루동안 발생한 일들로 머릿속이 조금 바빴지만, 어젯밤엔 상상을 하며 뜨개질실을 배합해 보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계기를 만들어준 플라스틱 뜨개실이 고맙다. 만들어진 새 뜨개수세미를 땅에 묻을 수는 없으니 부엌에서 써볼까 한다.
차라리 이런 실을 만들지 못하게 규제가 먼저 있어야 했다는 생각도 든다. 어디에서나 매일 쏟아져 나오는 흔하디 흔한 생수병이 만든다는 미세플라스틱 문제는 또 어떤가? 뭐 하나 미세플라스틱 공격에서 자유롭지 않으니 한껏 소심해진다. 그나저나 저 남은 반짝이 뜨개실을 어쩐다?
한동안 들썩이다가 잠잠해진 친구들 카톡방에 질문을 띄웠다.
"부엌 수세미로 어떤 종류를 사용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