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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가을이 왔어요

6살 남아의 가을 읽기

by 윤혜경

유치원 아이가 아프면


6세 남아를 양육하는 직장맘인 작은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훈이가 손과 발에 물집이 나타났어요."

"에고~"


"지금 지훈이랑 이서방이 함께 듣는 스피커폰이에요. "


지혜로운 작은 딸은 덤벙대는 내게 통화내용이 공유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오늘 밤엔 입속에도 나타났다네요.

만약 수족구병이면 월요일부터 일주일은 집에서 머물게 돼요. 4시까지 오전 돌봄이 필요한데,

혹시 엄마..."


질병이나 유치원 휴일 등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하면 아이는 유치원 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한다. 그럴 때면 여기저기 자신들의 반차 휴가를 포함하여 돌봄 손을 구한다.


그리고 빈자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내게 전화하는 딸이다. 나는 늘 그 빈자리를 부드럽게 채우려 노력한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갑을병정' 위계 중 '정'에 해당하는 미팅들이므로 조정이 불가하다.


"어떡하지? 다음 주 내내 일정이 어려운데..."


아이가 갑자기 아프면 여러 돌봄 손끝에서 돌아가는 아이 돌봄 스케줄은 이렇게 늘 보호자의 일상에 비상이 걸린다. 주말 '자연답사' 등으로 잘 지낸 아이는 일요일 밤부터 열이 오른다고 했다.


"소아병원들이 문 닫아서 2차 병원으로 가는 중이에요. 열도 있어서 지금..."


'이를 어쩐다? '

당황스럽다. 아이엄만 좀 답답할꼬....


한 시간쯤 후에 전화가 다시 울렸다.


"병원 다녀오는 길이에요. '수족구'라네요. 유치원 친구 중 앓고 있는 친구가 있다고 연락받았어요."


일주일 돌봄 일정이 여의치 않았을게다. 딸과 사위의 핸드폰 자판 누르기 손끝이 얼마나 바빴을지... 이번 주말엔 딸이 해외출장으로 토요일 늦게 인천 공항에 도착한다고 했다. 가까운 곳 가나 보다.


사위는 전화로 부산의 아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새벽에 KTX로 올라오셨다고 내게 전했다. 그렇게 월•화는 조부모 담당이 되었다. 수요일은 딸이, 목요일은 외할머니인 내가, 금요일은 사위가 유치원 등원시간에 해당하는 오후 4시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4시 이후는 아이 출생 후부터 맡아준 전문 돌봄 이모가 주 3일 맡는다.


그녀도 암수술을 받고 휴직을 거쳐 복귀 뒤 '체력이 달린다'라고 했다. 돌봄 이모는 그래서 사흘만 유치원 하원부터 보호자 퇴근까지 근무하기로 조정되어 왔다.


정년퇴직하신 안사돈이 월•화•수를 종일 전담해 주신다. 평생 주말부부로 지내신 두 분은 안사돈 정년퇴직 후부터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이할아버지가 계시는 부산에서 함께 머무신다.


사위도 국내외 출장이 아니라면 직장에서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상시에는 육아와 돌봄에 참여한다. 다행히 양가 할머니가 모두 서울에 거주 중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영유아 시절에는 부모대신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육아로 아이의 분리불안장애가 나타나 우리 모두 긴장했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확대가족들이 나서고, 돌봄 이모도 될수록 같은 사람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녀의 체력과 시간에 맞춰서 아이엄마는 시간을 학교시간표처럼 끝없이 확인한다. 아이가 아프거나 유치언 특별휴일과 방학때는 비상시가 된다. 그땐 돌봄시간표 '조정'이 반복된다.


작은 딸의 땀나는 맞벌이 부부 육아를 보면 차라리 엄마의 경력이 단절되고 순응해 육아를 할 수 있었던 70 80세대의 삶이 더 순했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딸이 직장과 육아 균형 맞추기에 어려움을 겪으며 갈등을 할 땐 늦게사 머리를 싸맨 노년의 동물교감치유 연구를 내려두고 "내가 하마"를 입 밖으로 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제를 잘 알기로 했다. 돌봄 이모는 탁월한 전문가이다. 나는 사범대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정교사로 근무를 했지만, 현대의 변화무쌍한 아동교육에 어려움을 느낀다.


리딩독 연구가 내겐 훠얼씬 수월한 임무이다. 노년에 어린아이의 성장을 다시 물 흐르듯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아이 돌봄을 맡고 계시는 대한민국의 조부모님들은 정말 마음도, 정성도, 체력도, 사랑도 대단하신 분들임을 실감한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초보 엄마 작은 딸과의 긴장관계 예방을 위해 작은 딸의 출산 직전에 나는 30대 중반의 환자였던 큰딸과 함께 힘든 산후관리사 자격증 교육을 신청했다. 논문 쓰는 중이었다. 결국 심사준비를 1학기 이뤄게 되었다.


무엇보다 두 가지 동시 집중력은 없는 내가 40여 년 전의 기억으로 산후조리를 평화롭게 잘할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다. 다행히 작은 딸이 출산 직후부터 전문 산후관리사의 도움을 받았다. 이 분야 교생실습도 못한 상태의 나는 우호지분 방문객으로 머물면서 친정엄마의 의무를 가까스로 주워 담았다.



유치원에서 전염병이 따라오고


돌아보면 영유아 초기엔 아주 건강하여 예방접종 외엔 병원 갈 일이 없던 아이가 유아원에 등원을 시작하면서부터 지속적으로 병을 얻어오곤 했다. 심지어 코로나19도 서너 번 감염되어 고생했다.


그때마다 등원시간에 함께 머물 대타를 구하는 일로 작은 딸 부부는 비상사태를 경험하곤 한다. 작은 딸의 가장 큰 지원군은 아이 탄생 때부터 지금까지 몸 바쳐 도움을 제공해 주시는 시댁 어르신들이다. 작은 딸이 경력단절 위험을 극복하게 된 든든한 배경이다.


오늘은 훈이를 위해, 아니 훈이엄마와 아빠를 위해 이리저리 밀고 당겨서 만든 시간이다. 이른 아침 6:30부터 서둘러서 7.30분경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을 타고 큰딸과 함께 작은 딸의 집으로 갔다. 출근준비 중이던 작은 딸은 그 와중에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친정엄마와 언니를 위한 아침 식사로 빵을 고소하게 굽고, 음료를 준비해서 식탁 위에 놓고 출근한다.


추석에 만났는데도 손자는 또 자랐다. 다리가 길어진 게 눈에 띈다. 오후 4시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입속과 팔, 다리 특히 발가락 사이와 발바닥에 아직 물집 흔적들이 도드라져 있는데도 잘 참는다.

"아프지 않아?"

"조금 불편해요."


잘 참는 아이가 신통하다. 이런 상태인데도 아이는 내색 없이 책도 잘 보고 장난감 블록도 잘 세우고 논다. 오후부턴 열이 조금 가라앉긴 했지만 시들 거 린다.


전문 돌봄 이모님 덕분에

3시 40분쯤 돌봄 이모님이 도착했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육아법을 배우게 된다.

"훈아, 오늘 이모가 뭘 가져왔게?"

영락없는 아기곰 가족의 유아 돌봄 이야기인 '베이비시터(BabySitter)' 책 속의 이웃 할머니 시터처럼


그녀는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훈이' 이름을 청아한 목소리로 낭랑하게 부르며 들어온다. 할머니와 이모에게 돌려진 아이와의 눈 맞춤을 그렇게 시도한다.


그녀는 거실을 지나 식탁 앞으로 가서 식탁 위에 손가방을 꺼내 놓고, 조금씩 틈을 열어 보이며 아이의 주의를 뭉치기 시작한다. 오늘 그녀는 가방을 열어 자그마한 오방색 헝겊 복주머니를 꺼내었다.


아. 이 복주머니는 사위가 장가올 때 가져온 선물박스 안에 다양한 곡식들이 채워져 있던 오방주머니와 닮았다. 나는 그 복주머니들을 여태 간직하다가 결혼 9년 만에 아이 돌잔치를 열었을 때 "이제 네가 간직하렴" 하고 선물했었다.


이모님의 복주머니를 아이가 받아 초롱거리는 눈빛을 하고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열어본다. 그곳에 아이가 좋아하는 투명한 미니젤리 상자가 손가락만 한 크기로 담겨있다.


아이는 최근에 6개나 충치가 발견되어 치과처방대로 치실까지 사용한다. 먹고 나선 이를 더 꼼꼼히 닦기로 약속한다. 아이에게 위로가 되는 달콤 약인 셈이니 아이부모와 돌봄 이모는 조금 너그러이 수용한다.


그녀는 자주 아이의 흥미를 돋우는 반찬거리나 간식이나 그림책, 장난감 등을 꺼내어 아이의 기분을 북돋는다. 그녀의 도시락 반찬 나물을 영유아기 시절부터 나누어 먹은 덕분에 아이는 지금 나물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우린 '할머니 스타일의 식성'이라고 어린아이를 놀리기도 한다.


아이 돌봄은 문자 그대로 돌봄에 초점을 둔다. 아이 반찬은 월요일에 오시는 사랑 가득한 친할머니 작품이 대부분이다. 작은 딸의 정성 가득한 아이반찬도 주말에 만들어져서 냉장고의 아이 식단 서랍에 넣어져 있다.



"이모, 가을이 왔어요"


4시면 유치원 하원시간에 맞춘 돌봄 이모 도착시간이다. 오늘은 집에 4시 전에 도착예정이다. 어질러진 블록세트를 내가 마음 급하게

"이거 이모님 오시기 전 정리해야 해"

했을 땐 요리조리 도망 다니던 아이다.


"훈아, 우리 이거 치우고 마트에 두부 사러 갈까?"

아이는 돌봄 이모님 소리를 듣자마자 이모님과 함께 금세 블록조각들을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아이방에서는 웃으며 도망 다니는 아이 대신 큰 이모가 혼자 정리했는데...

이렇게 전문가는 다르다.


"훈이가 지난주예요, 유치원 하원하는데 입구에서 나를 보자마자

<이모 가을이 왔어요.> 그래요."

"...? "

"그래서 제가

'어떻게 가을이 왔는지 알았어?'

하고 물었죠."


"제 손을 잡고 유치원 앞에 나무가 길게 늘어선 인도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러더니 거기 떨어져 수북한 나뭇잎을 밟으며

'들었어 이모? 가을소리 나지?'

하는 거예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아이가 제게 가을을 그렇게 보여줄 줄은 생각도 못했죠."


그녀가 신나서 내게 전하는 동안 나는 두 사람이 서있는 가을 풍경이 눈에 선하게 펼쳐졌다. 아이의 자그마한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 조각들이 눈부시다.



나는 영어가 싫어요


요즈음의 어린아이를 위한 유아유치원 교육은 참 좋아 보인다. 아이들이 입체적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도와주는듯해서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적으로 학원수업 과정을 시작하는 학부모들의 조급함은 걱정이 된다. 지나친 경쟁사회에서 놀이와 운동조차 XX전문 교실에서 과외로 배우는 사회가 되었나 보다.


일반 유치원에서 시작한 '영어책 듣기'와 '읽기 프로그램 과제 완성하기' 스마트 패드에 대해 아이는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얼마 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영어 유치원 아동의 공부를 소재로 만들었던 TV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평화로운 풍경이다. 어쨌건 모국어 기초를 넓히는 중인 어린아이는 영어 읽기와 듣기가 부담인가 보다.


"난 영어가 싫어요. 우리말 텔레비전 볼 거예요."

큰 이모가 영어만화영화를 틀어주니 보인 반응이다.

출처: https://www.kyobobook.co.kr/


자신의 아이와 하원 후 놀이터에서 함께 놀던 유아원 친구들이 대부분 영어유치원으로 옮겨갔지만, 작은 딸부부는 올해도 아이를 일반 유치원에 보낸다. 워낙 교육열이 하늘을 찌르는 곳이니, 결론 내리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다행히 자신들이 영어를 모국어인 한글보다 먼저 시작하는 해외에서 유아유치원 시절을 보낸 탓인지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고 모국어 습득을 우선으로 한다. 대신 집에서 짧은 표현을 온 가족이 함께 시도 중이다.


나는 날개책(flapbook)으로 구성된 "spot series"를 교보문고에 주문해서 추석에 선물했다. 이 책들은 아이엄마가 시드니 유치원 시절 수십 번 반복해서 읽고, ABC 드라마로도 반복해서 시청 영어 첫 발걸음 책이다.


강아지네 가족을 의인화해서 일상을 다양하게 소개하니, 어른인 나도 1990년대 초에 시드니에서 그림책을 읽어줄 때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던 교재이다. 지금은 구닥다리가 되었지만, 글밥이 적고 흥미롭게 구성되어 아이가 글자를 못 읽어도 강아지네 가족의 이런저런 일상에 대한 그림설명이 가능해서 좋다.

출처: https://www.kyobobook.co.kr/

아이가 아픈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진 셈이다. 만나서 반갑지만, 그래도 아프지 않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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