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와 맥락의 중요성 L : live
고수(高手)는 어떤 사람인가?
작가 서태공에 따르면 "고수는 그 분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다양한 분야의 고수들을 생각해보면 이 말이 고수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된다. 이세돌은 바둑을 둘 때 자유롭고, 박세리 선수는 (물론 요즘은 TV 예능에서 어떤 방송인 못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지만) 골프채를 휘두를 때 가장 자유롭다. 백종원이나 이연복 셰프는 사업가나 방송인이기 이전에 요리를 위해 화구 앞에 국자를 들고 섰을 때 가장 자유로워 보인다. 야구선수 이대호는 배트를 들면, 류현진은 야구공을 던질 때 누구보다 자유롭다.
다른 내용이기는 하지만 한 불교 경전에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같은 의미에서 바람은 그물에서 자유롭다.
한 분야를 오래 전공하고 연구한 교수들은 자신의 분야에서만큼은 생각이 막힘이 없고 사소한 것에 얽매일 가능성이 적다.
‘고수는 ~로부터 자유롭다’는 똑같은 구조의 정의를 작가 한근태는 <재정의>에서 ‘부자’를 그렇게 봤다. 그는 “부자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딱 잘라 정의했다. 그렇다. 돈에 연연하지 않고 돈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부자다. 누군가는 그랬다. 고급차를 몰면서 어느 주유소의 기름값이 더 싼지 검색하거나, 찾아서 다닌다면 자신의 깜냥에 맞지 않는 차를 모는 거라고.
어떤 분야의 고수가 그 세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고수는 적어도 그 일을 할 때는 몸에 힘이 들지 않고 자유롭다. 여기서 한 작가의 <재정의>에 딱 들어맞는 단어가 있다. “힘이 든다” 한 작가는 어떤 일을 할 때 힘이 든다는걸 ‘의미를 모른다’로 정의했다. 의미를 모르니까 힘이 든다. 어디선가 헤매고 있다는 뜻일테다. 운동의 고수들은 힘을 뺄 줄 안다. 힘을 빼야 몸의 관절이 제대로 돌아간다.
진짜 1만 시간이면 될까?
그렇다면 어떤 분야의 일을 할 때 힘이 들지 않는 고수가 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할까. 이건 분야에 따라 다르다. 한때는 '1만 시간의 법칙'이란게 유행했다. 심리학자 에릭슨(K. A. Ericsson)은 바이올린에서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실력 차이는 만 시간을 연습하느냐에 따라 나뉜다고 했다. 이런 내용은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의 저서인 아웃라이어<Outliers>를 통해 더욱 잘 알려졌다. 10,000시간은 하루에 얼마만큼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다르다.
1일 3시간 → 1달 90시간 → 1년 1080시간 → 10년 걸림
1일 5시간 → 1달 150시간 → 1년 1800시간 → 6년 걸림
1일 10시간 → 1달 300시간 → 1년 3600시간 → 3년 걸림
고수가 되려고 마음 먹었다면 하루 10시간 투자해서 3년이면 될까?
말 잘하고 글 잘쓰는 사람들을 살펴봤더니...
조승연 작가는 외국어를 공부할 때 자유자재로 모국어처럼 말을 하고 글을 쓰는 단계를 '숙달하다, 통달하다' 뜻을 가진 단어인 mastery를 가졌다고 해서 ‘have productive mastery’라고 했다. 뜻에 맞는 단어를 찾아서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말인데 영어에서 이 단계에 오르려면 하루 3시간 투자할 때 10년이면 될까?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의 40대(시사영어, 성문OO영어, 민병철 생활영어, 오성식의 굿모닝팝스 안해본 적이 없고, 책장 가득 영단어 암기법, 각종 토익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OO 공부 절대 하지마라 등 각종 비법 책 수십 권 안 사본 적이 없고, 유튜브에서도 아직까지 영어 비법 관련 콘텐츠에 눈이 가는 보편적인 필자 또래의 직장인)의 경우 영어 공부를 최소 10년 이상은 했을텐데 통달은 고사하고 아직도 외국인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분야에서만큼은 자유로운 고수에 대한 정의를 말과 글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말을 잘하는 고수. 말의 고수는 일단 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말을 할 때 자유로운 사람은 두가지다.
첫째, 진짜 말을 잘 하는 사람의 말은 시기와 맥락이 지금 이 순간에 딱 들어맞아 자유롭다.
어떤 사람이 조리있게 말을 잘 한다. 그 사람의 머릿 속에서는 다음 말을 생각하지 않고 술술 말이 풀려나온다. 이런 말은 듣는 사람도 이해가 잘 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장벽이 없는 상태. 말하는 사람은 진정한 고수라고 볼 수 있다. 듣는 사람이 말을 잘 이해하게 될 때 우리 말에서는 ‘가다’란 말을 쓴다. ‘가다’는 국어사전에서 어떤 일에 대해 납득이나 이해, 짐작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말을 듣고 이해가 가고, 세상이 바뀐 것이 실감이 가고, 선배의 경험담에 수긍이 가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고, 상대방의 처지에 동정이 간다.
둘째, 말은 잘 하는 것 같은데 듣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 말은 자유롭지 않다.
말 하는 사람은 거침없이 말을 하는데 듣는 사람은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말하는 사람은 자유롭되 듣는 사람은 자유롭지 않다. 말은 듣는 순간의 시기와 맥락이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앞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생각을 붙들고 있다보니 다음 말을 놓치게 되고 생각은 건너뛰게 된다. 소통이 실패된 상황이다. 말이나 글에서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거꾸로 ‘오게’ 만드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상대방이 오게 만드는데 실패한 사람은 말이나 글의 고수가 아니다.
말과 글의 고수는 그렇다. 시기와 맥락이 들어맞아 지금 이순간에 살아있다(live).
첫째, 일단 말을 하거나 글을 쓸때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술술 풀려나와야 한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내가 힘들면 안된다. 이를 충족하면 일단 진정한 고수의 충분 조건이 완료된다.
둘째, 내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데, 상대방이 오게 만들어야 한다. 상대가 공감이 가고,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고, 납득이 가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화자와 청자 사이의 거리는 줄어든다. 여기까지 되면 고수의 필요 조건까지 완료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을 하고 글을 써야 상대를 나에게 '가고' ‘오게’ 만들 수 있을까? 답은 ‘you’(불특정 다수의 상대방, 당신, 시청자, 청취자)를 항상 염두에 두는 것에 있다. 그래야 살아있는 말이 된다. 살아 있는 말을 잘하는 고수들은 어떤 사람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