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과 고은 L : live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집에는 항상 책이 많았다. 책 소유욕은 자연스럽게 불어나는 책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최소한의 책만 남겨두고 모두 기부하거나 중고서적으로 내다 팔았다. 모두 3번의 기간이다. 책이 내게 들어오고 나갔던 큰 시기를 구분해보면.
scene 1. 1차 분서갱유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대학에 갈 때까지 꽤 많은 책이 있었다. 자기계발서를 비롯해서, 문학, 에세이 등이 빼곡했다. 원룸과 오피스텔을 전전긍긍하던 결혼 전까지 책은 곧 짐이었다. 이삿짐 센터에서 제일 싫어하는 고객은 학자나 교수라는 얘기를 들었다. 일단 책이 많은 직업들이다. 큰 가구나 가전제품처럼 당장 눈 앞에 짐이 많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집에 있는 모든 짐 가운데 책은 부피 대비 가장 무겁고, 짐을 싸기 불편하며, 손이 많이 가는 이삿짐이라고 이삿짐 업체분들이 얘기했다. 내 경험으로 봐도 확실히 그렇다.
그렇게 모였던 책들은 대학졸업과 입사와 동시에 트럭 한 대분의 기부로 이어졌다. 아무리 봐도 버리기 어려운 책들이 오피스텔을 옮길 때마다 따라다녔지만 책제목과 표지만 눈에 익숙할 뿐 절대 2번은 읽지 않는 그런 책들이었다. 눈 앞에 보이면 아깝지만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생각도 나지 않는다. 책과 사람은 그렇게 닮았다.
scene 2. 2차 분서갱유
직장인이 되면서 남는 시간은 부족했다. 특히 나를 위한 시간, 글 읽을 시간, 공부할 시간… 부족한 시간은 다시 책을 구입함으로써 대리 만족을 얻게 됐다. 일단 사고 보자.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는 자기 계발서, 문학,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신작은 서점에 갈 시간이 없는 나에게 의무이자 숙제였다. 서점에 갈 수 없는 대신 인터넷 서점의 높은 할인율은 책 소비를 위한 손 쉬운 마중물이었다. 그렇게 십 수년을 지나니 다시 예전 만큼의 책이 쌓였다. 제목만 봐도 뿌듯하고 보기에 좋은 두꺼운 양장본의 고전과 서적들도 꽤 많았다.
읽지 않았던 책은 제외하고 한번은 봤지만 두번은 열지 않는 책들을 다시 중고서점에 내다 팔았다. 인터넷 기반의 대형 서점들이 중고책 사고팔기를 쉽게 만들어 놓은 탓에 고민하는 시간은 길었지만, 정작 파는 시간은 짧았다. 오랜 기간 책장을 차지했지만 처분에는 채 몇분도 걸리지 않은 많은 책들이 그렇게 또 눈 앞에서, 마음에서 잊혀져 갔다.
scene 3. 그래도 살아남은 책들...
그래도 책장에 남아있는 책들은 대충 두가지다.
첫째, 여러번 읽었지만 또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 같은 재미를 주는 책.
둘째, 여러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어렵고, 어렵지만, 읽어야만 하는 의무감에 좀처럼 버릴 수 없는 책이다. 대부분 말을 잘하거나 글 좀 잘 쓴다는 고수들이 칭찬하는 그런 책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대비되는 두 사람이 있다.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건,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떤 점을 부각해서 보느냐에 따라 상반되거나 엇갈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개인에 대한 평가는 제외하고 ‘말하고 글쓰는 법’에 국한해서만 보기로 한다.)
먼저, 유시민.
유시민 작가는 단언컨데 지금 서점가와 방송, 유튜브 등 미디어 시장에서 흥행이 보증된 브랜드 파워를 가지고 있다. 유시민 작가와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면 안다. 요즘은 방송 이후 유튜브를 통한 듀얼 퍼블리싱이 이뤄지기 때문에 단순 방송 시청률로 알 수 없었던 유입 경로를 잘 분석할 수 있다. 유시민 작가와 진행했던 방송의 유튜브 클립을 통한 시청의 키워드 대부분은 검색어 ‘유시민’을 타고 들어온다. 댓글도 폭발적이다. 많은 책을 출간하면 성공과 실패작들이 있기 마련인데 유 작가의 책들은 대부분 출간 즉시 상위권, 이후 몇번의 재인쇄로 흥행 가도를 달린다.
‘브랜드 파워’ 유시민 작가는 글 쓰기와 책 읽기에 대한 교육이나 노하우 전수에도 열심이다. 고등학교 시절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유 작가가 펴낸 책의 대부분을 사서 읽었고, 지금도 책장에 꽤 여러 책이 남아있다. 글발있는 유 작가가 강조하는 글쓰는 방법은 제대로 된 잘 쓴 글을 여러번 읽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들면 박경리의 <토지>를 몇번씩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유 작가의 글은 생동감이 넘치고 독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 어려운 말을 돌려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관점과 분석을 빼놓지 않는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논리적인 설득을 잃지 않는다. 장르를 넘나드는 유 작가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옛날부터 추천해왔고 최근에는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출간했다.
다음, 고은.
반면, 무릎 탁 치는 언어의 마술사, 고은의 시는 읽는 시가 아닌 낭독하는 시다. 보편적인 감정을 우리 말로 표현하지만 그걸 위해 잘 쓴 남의 글을 읽는 것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다. 시 강의에서는 기존의 어떤 이론도 배제하며, 표현이 문법이나 장르, 형식이나 양식을 거부한다. 한정원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고은은 그렇게 얘기한다.
"표현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수레바퀴가 굴러가면 바퀴 자국이 생기는데 이게 표현의 문법이자 장르, 양식이다(한정원, 2014, <명사들의 문장 강화>). 문법이나 글 쓰는 방법이 먼저가 아니다. 글이 먼저다. 형식은 그다음이다. 이른바 ‘수레바퀴와 바퀴자국론’이다. 그렇게 고은의 시는 언어를 거부하는 고승(효봉스님)의 영향과 시대적 분위기 속에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게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가령 이런 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순간의 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고은을 꼽는 이유는 다음에 있다. 고은 시인은 후천적인 단련도 강조한다. 재능이 아무리 있어도 내 곁을 무심코 지나쳐 가는 꽃을 보는 눈이 없으면 결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는 눈은 연습을 해야 길러진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나 교수가 강조한 "아는 만큼 보인다"와 비슷하다. 자꾸 보다보면 안목이 생기고, 안목이 생기면 평소에 지나치던 것들도 눈에 들어온다. 고은의 ‘순간의 꽃’은 그런 눈을 강조한 시라고 생각된다.
글 잘 쓰는 두 고수는 이렇게 다르지만 어떤 점에서는 서로 너무도 닮았다. 유시민 작가의 책에서는 유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고은 시인의 시는 글이 살아 움직인다. 책을 읽고 있어도 저자의 음성을 직접 듣는 듯하며, 구어체가 아니지만 낭독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것이 박경리의 <토지>에서 왔던, 자연에 대한 관찰과 영감, 노력에서 왔던 두 사람 고유의 톤으로 남았다. 두 고수의 글이 살아있는(live) 이유는 이렇다.
유시민의 스타일은 길게 늘어 쓰지 않고(short), 톤(tone)이 살아 있으며(live), 글을 읽거나 말을 듣는 청자(you)를 항상 생각하고, 표현은 맛깔나다. 고은의 스타일은 짧음의 극치이며(short), 와인의 브라인드 테스트와 같은 실험을 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고은체’가 있다(tone). 독자와 공감하며(you), 낭독에 최적화되어 있지만 읽기만 해도 살아숨쉰다(live). 이 모든 것은 풍부한 표현이 되어 완결된다(expressive). 두 고수의 스타일은 이렇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