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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라멜 Aug 30. 2023

내 글을 읽는 당신은 누구?

고수로부터 배우는 스타일 Y : you

내 글을 읽는 당신을 생각하는 순간 글은 달라진다.


scene 1. 해


“동해의 일출이 시라면 서해의 일몰은 서사이다”


한 일간지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는 칼럼리스트 조용헌 작가의 기가막힌 표현이다(<고수기행>, 2006). 그는 발로 뛰는 동양학과 명리학 작가이며, 대한민국 방방곡곡의 고수들을 찾아내고 명문가를 수소문해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곁들인 글발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분야를 찾아 나름의 논리로 칼럼이나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까닭에 조용헌 칼럼리스트의 기고문이나 작가 조용헌의 책을 볼 때는 물음표로 시작했다가 느낌표로 끝난다. 그런 책들은 내 책장 한 곳에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조용헌, 김훈, 유시민은 일단 음식을 만들기에 앞서 시장 이곳 저곳을 돌며 장을 충분히 보고 음식을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동해의 일출이 시라면 서해의 일몰은 서사이다”를 내 생각대로 해석해본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 하루의 시작이다. 시작은 비어있음이다. 해가 뜨는 새벽의 아침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백지의 상태이다. 시도 그렇다. 시의 묘미는 단어를 줄이고 글을 줄이는 것에서 나온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의미가 공백에서 전해지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의미는 가득 채워진다.


시작은 가능성이다. 모든 것이 열려있는 상태이다. 희극이 될 수도 비극이 될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시의 의미도 그렇다. 시인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학교 다닐 때 국어 시간에 어려웠던 것은 천편일률적인 시 강의였다. 열려있는 시의 의미를 모든 독자들이 같은 반응을 보이도록 암기시키는 시간 같았다. 시인은 원하지 않았을텐데…


시작은 에너지 100%의 충만한 상태이다. 사람들은 일출을 보고 한 해를 계획한다. 일출을 보고 하루를 생각한다. 지나간 날보다는 오지 않은 내일을 꿈꾼다. 일출은 어린 아이다. 그래서 꿈틀거린다. 시는 살아서 숨쉰다. 노래와 같은 리듬이 있고 감정에 호소한다.


해는 서쪽으로 진다. 하루의 끝이다. 끝은 꽉 차 있음이다. 해가 지는 저녁은 모든 일이 벌어진 다음이다. 서사는 내러티브이며 스토리텔링이다. 주인공이 있고, 일이 있으며, 그 결말이 있다. 함축적인 은유보다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감정 보다는 이성에 가깝다.  


일출은 마음을 흥분시키고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지만 일몰은 나를 차분하게 만든다. 일출의 태양은 홀로 가장 빛나지만 일몰의 태양은 주변부터 붉게 물들인다. 일출은 놓치기 쉽지만 일몰은 서서히 하늘을 물들이고 나에게 어느정도 시간을 준다.


끝은 받아들임이다. 모든 것이 닫혀있는 상태며, 결론은 이미 나 있다. 서사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시작과 끝이 있다. 국어 시간에 배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꼭 나눠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맥락에 따라 연결은 돼야 한다.


MBTI식 접근에 따르면 시는 직관형(N) 서사는 감각형(S) 인식에 가깝다. 시는 감정형(F)이지만 서사는 이성적 사고(T)에 어울린다.


scene 2. 산과 바다


“산에 가면 일기를 쓰고 바다에 가면 편지를 쓰세요”


고은 시인이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명사들의 문장 강화>, 2014, 한정원).


산과 바다의 차이는 뭘까? 일단 바다 출신들은 바다를 좋아하고 산 출신들은 산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 외갓집은 바다를 가까이에 둔 산골에 있었다. 당연히 바다를 좋아할 것으로 생각됐던 외삼촌은 바다는 무섭고 산에 가면 마음이 푸근해진다고 했다. 반면, 제대로 바다인 제주도 출신 숙모는 산에 가면 답답하지만, 바다에 가면 마음이 뻥 뚫려서 좋다고 했다. 부산 출신인 난 그냥 바다가 좋다. 서해보다는 남해와 동해가 더 좋다.


고은 시인은 같은 인터뷰에서 시는 심장의 언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산과 바다를 ‘타자(他者)의 있고 없음’으로 구분한다. 산은 닫힌 공간, 나와 자연 외에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다. 반면, 바다는 수평선 넘어 다른 세상이 있는 열린 공간, 타인의 존재가 따라 다니는 곳이다. 혼자만의 공간에서는 일기를 쓰고, 타인이 있는 곳에서는 편지를 쓴다.



당신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내가 생각하는 시와 서사(내러티브), 일기와 편지의 차이점은 ‘당신의 존재’에 있다.

시는 친절하지 않다. 시인은 장황한 설명을 배격한다. 반면, 서사는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설명하듯이 풀어간다. 화자의 목소리가 분명히 드러나고 그 대상은 독자를 향한다.

 

마찬가지로 일기는 두번 다시 읽을 일 없는 나만의 끄적거림이지만 편지는 너가 있다.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그 첫 문장부터 달라진다. 언제부턴가 여름 바다보단 가을 바다, 겨울 바다가 좋았다. 바다에 가면 누군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산에서와는 다르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일기를 제외한 모든 글은 독자, 즉 읽는 대상이 있다(물론 학교 다닐때 썼던 일기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읽는다는 가정 하에 내 감정이나 느낌을 솔직히 쓰기 보다는 도덕적으로 모범 답안에 가까운 일기 쓰기가 많았다). 그것이 에세이든 학문적 연구를 위한 논문이든 청자, 독자를 생각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글쓰기의 원칙이다. 내 글을 읽을 대상을 생각하고 써야 한다는 말이다.


대상에게 쓰는 글은 상대가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써야한다. 관심과 공감을 위해 친절해야 한다. 독자의 수준에 따라 쓸 수 있는 단어와 정보, 관련 설명의 수준이 달라진다. 독자와의 교감에 성공한다면 굳이 ‘좋아요’와 ‘구독’을 하소연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오늘도 내 글을 읽을 독자들이 고민된다.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내 글은 규정된다. 오늘도 난 그들에게 소홀했다.


에필로그.

내가 열심히 쓴다고 해서 내 글을 읽는 독자가 반드시 열심히 읽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 글쓰기가 그랬다. 내가 쓴 논문을 바쁜 교수들이나 동료 연구자들이 꼼꼼이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부분 초록이나 서문, 결론만 본다는 얘기를 들었을때 잖이  혼란스러웠다.


난 어떤 글을 쓸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최소한 모든 문장에 공을 들인다. 독자가 어느 페이지의 어떤 문장을 보고 내 글을 평가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어느 한 문장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그가 어떤 문장을 읽을지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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