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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텐츠아트 진 Sep 01. 2024

맨해튼 한폭판 밀당

결국 내 안의 한국어는 영어와 한판 붙었다


뉴욕 어학원 기숙사 방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딱 보이는 것이 방 문이었다.


"저 문을 열면..."


그렇다. 저 문을 열기만 하면, 온통 영어세상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튀어나올 것같은 옆방 친구도, 같은 구역 부엌에서 만날 친구도, 일층으로 내려가면 365일 부스에 앉아있던 유쾌했던 젊은 경비원도 모두 영어였다. 기숙사 밖을 나가면 점점 심해진다. 거리에도, 식당에도, 캠퍼스에도 어딜 가도 영어였다. 어학원마저 과정전체가 미국일색이었다. 책 속에만 있던 영어가 유기체가 되어 온 공간을 다 메우고 숨 쉬며 살아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영어가 [고스트 버스터즈 Ghost Busters]에 나오는 거대한 하얀색 마시멜로 캐릭터 Stay Puft Marshmallow Man가 되어 소리 없이 나에게 덮쳐오는 기분이랄까? 영어를 피해 어디로 빼달아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 3개월은 숨을 돌리기 어려웠다.


Stay Puft Marshmallow Man in the movie[Ghostbusters]


이것은 내가 나에게 기대했던 것이 아니다. 영어의 중심지인 뉴욕 맨해튼에 오면, 영어에 자극을 받아서 영어를 더 잘 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더우기 난생처음 영어로 듣기와 말하기를 시도하고 있지 않은가? 사방팔방에 미국 원어민들이 우굴우굴하니 내 의식은 가능한 한 빨리 소통하고 싶었겠지. 영어일색 언어환경이 내 호기심을 백분 자극하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내면 어딘가에서는 계속 딴지를 걸어왔다. 그것은 한국말이었다. 특히 어학원에서 강사가 물었던 euphemism의 뜻이 트리거가 되었다. 영어로 답을 못하고 한국말로 답을 했다는 사실이 목구멍에 걸렸다. 그 뒤로 계속 한국말이 걸리적거렸다. 단순히 영어로 문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좀 버벅거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영어로 자극이 들어오면, 내 마음은 여지없이 한국말만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운동장이 되었다. 영어로 자극을 받으면, 빛의 속도로 한국어가 뛰어들어 무의식적으로 간섭을 당하고 있는 상태에 빠져들었다. 어쩌다 영어로 말을 건 미국인 앞에서 나는 전혀 딴생각에 빠져있는 꼴이 되었다. 한국말이 뒤통수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영어 호기심

한국에 있었을 때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다. 영어나라에 와서 뒤를 돌아보니, 국내의 언어상황은 사실 주위가 온통 한국말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새삼 객관적으로 보였다. 여기서는 두가지가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일단 나의 영어 호기심이 안심을 했다.


나의 영어여정은 왕성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가 끝났을 때 중학교 입학을 하루빨리하고 싶었던 나를. 그러나 앞에 긴 겨울방학이 놓여있었다.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이랬던 이유는 남들이 들으면 좀 오글거릴지도 모르겠지만, 하루빨리 영어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아이러브 스쿨을 통해 어른이 된 반 친구들을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영어 가지고 떨었던 극성에 대해 한 마디씩 했다. 그들에게 보낸 마지막 성탄카드에는 "중학교 가면 영어 잘하자"라는 말을 다 써주었다고 한다. 지금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밥맛 떨어진다고 왕따를 당했으려나? 아직 순진할 수 있던 시대였다고 본다. (참고로 그때는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웠다.)


나는 결국 중학교 입학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세뱃돈을 털었다. 한걸음에 달려가 펜촉, 펜대, 잉크, 4선이 그려진 영어노트, 그리고 영어알파벳 펜맨십 책을 샀다. 이것이 내가 영어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였다. 그냥 연필로 쓰는 언어가 아니라는 것! 서양언어니까 펜으로 써야 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이국적이라는 것! 처음으로 써보는 펜, 그리고 처음 그려보는 알파벳이었다. 손가락에 노트에 방바닥에 옷에 여기저기 잉크 다 묻혀가면서 열심히 독학으로 영어에 입문했다.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혼자만의 재밌는 추억이다.



pen, ink & paper



이 과정에서 한국어가 제동을 건 일은 전혀 없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영어에 빠져든 것이다. [비정상 회담]에서 보면, 한글의 모양새에 매료되어 한국어를 시작한 서양인들이 있다. 뉴요커이자 수재인 마크는 학교 기숙사 옆방 문에 걸린 작은 보드에 쓰여있던 "오빠, 안녕"에서 한글의 동그라미를 처음보고 한글에 완전히 빠져버렸단다.


마찬가지로 13살짜리 동양아이 눈에는 영어 알파벳이 진짜 신기한 문자였다. 소문자와 대문자가 있는 것이 특이했다. 늘 쓸 수 있는 필기체가 있다는 것도 뭔가 전통적이고 사연이 깊은 것 같았다. 특히 유독 왼쪽으로 꺾어 쓰는 대문자 필기체 I는 기이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철자 하나하나를 연결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이 신통방통했다. 철자가 연결되는 글자가 있다니. 한글에서는 없는 매력이 내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나는 시각적으로 영어에 매료된 것이다. 마치 새 세상에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나의 호기심은 알파벳에서 멈추지 않았다. 책방에서 얼핏 봐 두었던 펜팔 가이드란 책이 떠올랐다. 인터넷이 없던 그때, SNS가 없던 아날로그 시절에는 펜팔 Penpal이라는 것이 있었다. 편지로 친구로 사귀는 것이다. 펜팔 가이드에는 서양친구들의 주소 목록이 있었다. 정말 이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 답장이 올까? 무슨 배짱이었을까? 한번 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나를 멈추지 못하게 했다.


이 책에서는 예시로 들어 놓은 편지가 많았다. 여기서 가이드한 대로 "Hi, OOO, How do you do? My name is OO. ~~~"  거의 베껴 쓰다시피 하여, 물론 나 딴에는 근사한 필체로, 편지를 썼다. 좋아 보이는 이름을 하나 골랐다. 그 이름 밑에 적힌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정말 올까?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온통 들떠있었다. 영어주소를 직접 쓴 편지를 들고, 우체국에 가서 색다른 우표를 붙여서, 미국으로 보낸다는 일 자체만으로도 어린 내 마음은 벅찼다.



penpal letters


그런데 실제로 답장이 왔다. 영어로 주소가 쓰인 편지를 받은 순간, 감동은 우와! 지금도 생생하다. 영어로 써서 보냈더니, 영어로 반응이 오는구나. 새로운 통로가 하나 터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것도 한국과 미국사이에 있는 그 넓은 태평양을 연결하는 장거리 통로! 그 뒤로 학교시작할 때까지 두세 번 편지가 오간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소통의 느낌은 너무 진하여 지금까지 내 영어의 기준이 되었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한국어가 간섭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나는 일사천리로 영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영어는 거의 종이자료에서 만났다. 중학교 영어교과서 본문을 달달 외우고, 외운 단어가 달아날까 봐 겁이 나서 단어 하나에 백번씩 썼다. 대학에 가서는 전공원서 독해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용이 난해한 것들, 예를 들어 약물중독 종교체험의 다른 점 같은 것을 읽을 때는 플라스틱 씹는 기분이 든 적은 있었지만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넘쳐나는 내 호기심을 방해할만한 것이 없었다. 안심한다는 의식조차 필요없을 정도로 열린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또하나 안심하고 있던 것은 한국어였다. 내가 영어에 대한 호기심으로 영어와 친해져도 한국말은 안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독해영어는 영어로 입력하는 과정에서 한국말출력이라는 당당한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말을 버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한국어와 영어는 내 안에서 적당하게 타협을 하고 잘 지내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영어나라에 오니까 한국어가 방어벽을 치고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자꾸 미국인 앞에서 한국말에 빠져있는지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애를 썼다. 거기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보다 몸집이 엄청나게 큰 미국이들이 무서웠다. 이 큰 아이들과 소통의 길이 열리는 순간을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들의 몸집처럼 큰 영어가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거나, 아니, 그 마시멜로 캐릭터가 녹아내려 나를 덮쳐버리면 내 존재감이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이 있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영어로 대답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을 일부러 놓쳐 버리는 것은 아니었는지? 나는 이렇게 막연한 위기감으로 혼자 드라마를 쓰고 있었다.


이런 위기감 때문이었다고 본다. 나의 모국어인 한국말이 자리를 안 내준 것은. 눈을 통해 영어가 들어왔을 때는 출력이라는 한국어의 역할이 있었다. 귀로 영어를 받아들여야 하는 지금은 그마저도 빼버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것에 대한 반항 같았다. 이때 처음 알았다. 한국어가 이렇게나 대단한 기승을 부릴 수 있구나. 마치 내가 한국인을 버리는 것처럼 난리를 친다. 영어로 듣고 영어로 말한다고 하루아침에 미국인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간단한 영어문장 하나 시작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YES!



뒤돌아갈 수 없으니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맨해튼 한복판에서 한국말과 밀당을 적극적으로 하기로 맘 먹었다. 한국말의 간섭을 어떻게 서든 치우던지 잠재워야 했다. 나 자신과 타진한 가능성은 요샛말로 메타인지였다. 한국말 간섭이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다. 쉽지는 않았다. 시도를 하면 하면 할수록 간섭은 더 격렬해졌다. 상상으로 시각적 시뮬레이션을 정말 많이 했다. 영어로 자극이 들어왔을 때 한국말이 튀어나오려는 그 순간을 제어하는 나 자신을 많이도 그려보았다. 엄청난 집중으로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다.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간섭이 심했던 한국말은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한국말로 기승을 부린 방어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밀당이 끝난 자리

그런데 한국말 장애물을 치운 결과는 의외였다. 기대와 달리 여전히 내 안에서는 영어로 반응이 없었다. 순간 불안했다. 오히려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아무 생각이 안나는 진공상태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하얀 진공상태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한국어 간섭이 치워지고 영어가 들어올 공간이 준비된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을 해 보았다. 왜냐면 내가 했던 고생이 너무 아까웠다. 살리고 싶었다.


영어로 자극을 받고도 이 하얀 상태에 빠질 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 보았다. 그렇게 좀 지나니까 재밌있는 현상이 일어났다. 내가 배웠던 영문들이 살살 떠오르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보였다. 그림처럼. 한국말을 떼낸 영어가 자유롭게 하얀 공간에 떠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내가 배운 영어가 어디 간 것은 아니었다. 결국 영어에 대한 내 호기심이 방어심을 이겨낸 것이다.


내 영어여정을 전체를 돌이켜 볼 때, 한국말 간섭을 치웠던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내적 싸움이었다. 그 이후로도 영어 하면서 한국어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왔다. 이 격렬한 싸움이 끝나고 나니, 다음에 할 일은 분명했다. 내 마음에 떠다니는 영어를 정착시키는 일이다. 글에 갇힌 탓이라고 여겼다. 이제는 이 불쌍한 영어에 소리를 입혀야 한다.





감사합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콘텐츠아트 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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