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운다
미국인들이 도시에서도 팀버랜드 워커 Timberland Walker를 신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멋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폭설 때문이었다. 그 해 뉴욕 맨해튼에는 거의 날마다 폭설이었다.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덕분에 아침마다 눈을 헤치며 걸어서 등교를 해야 했다. 나에게 배정된 기숙사가 학교 캠퍼스 밖 7블록정도 떨어져 있던 탓이다. 맨해튼의 거리를 그리드로 구획해 놓았기 때문이다. 학교 캠퍼스도 그리드를 따라서 쪼개져서 모든 건물이 한 곳에 몰려있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는 맨해튼의 그리드 거리를 좋아했다. 그리드로 평평하게 만든 거리는 눈길이라도 걷기가 좋았다. 장난치기도 좋았다. 뉴욕이란 낯선 곳에서 맞아보는 폭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미국본토에 처음 온 나 같은 아웃사이더에겐 더욱더 신나는 충격이었다.
한편, 뉴욕의 어학원도 나에게 폭설을 퍼부었다. 겨울 내내 신선한 충격의 연속이었다. 정반대의 의미에서 신선한 충격이어서 더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영어 원어민들을 원 없이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왕창 무너졌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원어민은 세분의 여자강사와 어학원 건물에서 일하는 직원들 뿐이었다. TV에서나 보았던 [하버드 대학의 공붓벌레]의 하트 Hart 같은 지적인 대학생이나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수다 떨던 미국인아저씨들은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이들과 모임을 중재하는 프로그램 따위는 없었다. 당연히 내가 원했던 평범한 영어는 어학원 어디에도 없던 것이다. 한국 해외언어연수 초창기였던 그때 사전정보가 많지 않아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기대였다.
수업도 한국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는데 놀랐다. 수업시간 주제가 주로 뉴욕의 반달리즘 NY Vandalism, 뉴욕의 홈리스들 NY Homeless, 벤앤 제리 아이스크림 회사의 혁명적인 생산공정과정 Ben & Jerry's innovative Production Process,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인기 있는 건축양식 the architectual style of Frank Lioyd Wright, 안락사 euphemism 그리고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 the Global Leadership of America 등등이었다. 모든 주제가 미국적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수업방식도 주입식이라는데 또 놀랐다. 기본적으로 읽기로 시작한다. CNN이나 NewYork Times, ABC News 그리고 News Week에서 발취한 짧은 기사들이 주된 텍스트였다. 내가 버리고 온 독해영어와 같은 구조의 수업이었다. 텍스트가 전공원서에서 시사적인 글로 바뀐 것뿐이다.
이 텍스트를 중심으로 듣기와 말하기 그리고 쓰기로 확장시킨다. 먼저, 주로 원어민 강사가 텍스트에 나온 단어나 표현등등을 설명해 준다. 안 들을 수가 없으니 듣기를 한다. 그러나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반 친구들과 그룹토의를 시킨다. 할 말은 많았지만 몇 마디 못한다. 거의 영작 수준의 말하기였으니까. 작문은 숙제로 내주었다. 이것도 역시 한국말 영작하는 수준이었다. 영어 지식을 주입하지는 않았다. 반면, 영어가 전달하는 미국적 가치를 주입한다는 느낌은 떨칠 수가 없었다.
이 방식은 동양학생보다는 유럽학생들에게는 잘 통해 보였다. 영어가 전달하는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정말 한 학기 만에 귀 뚫고 입 트이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프랑스나 이태리 친구들을 보았다.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같은 범주에 있었으니 당연했다. 또한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통용되었던 영어 교습법은 대부분 유럽인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많이 확장되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영어로 수다도 못 떠드는 동양인인 나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겨울 끝무렵, 어학원이 그냥 영어만 가르치는 기관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갔다. 미국 대학진학을 위한 일종의 준비과정이었다. 일상영어부터 시작하여 미국에 관한 내용의 강도를 일괄적으로 올려가는 것이다. 일반과정(1단계~8단계)에서는 시사적인 내용을 많이 다루다가 특수과정(9단계, 10단계)에 가서는 미국의 헌법, 경제, 정치제도까지 가르친다. 이즈음 되면 거의 대학의 입문 강의 수준이었다. 다시 말하면 외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통해 미국의 가치를 심고, 미국사회에 진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어느 단계에서 그만두어도 이런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는 구조였다.
어학원은 나의 영어실력을 레벨 7로 진단하였다. 내 독해실력을 기준으로 진단한 레벨 같았다. 아마도 나의 목표가 유학이라는 것을 알고 특수과정으로 진입을 기대했던 것도 같다. 이것이 어학원이 나에게 했던 기대였다고 본다. 나름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물론 나는 세분 강사들의 직업윤리 workethic 의식에는 감탄을 했다. 영어를 배우겠다고 미국까지 건너온 동양인의 노력을 백분 존중하는 태도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번도 약소국의 자존심을 건드린 적이 없다. 학생들의 영어가 아직 짧고, 문화적인 이해가 부족하여, 가끔씩 선을 넘어가 무례한 언사나 행동을 해도 눈 하나 꿈쩍 하지 않는다. You can do it! 끝까지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그들의 열정에 감탄을 했다. 이것은 한국의 열정 선생님과는 좀 다른 차원의 열정이다. 뭐랄까? 최선의 서비스를 보장하는 자본주의의 프로들이라고 해두자!
덕분에 미국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배웠다. 그 당시 뉴욕시장으로 선출된 이가 루디 줄리아니 Rudy Giuliani라는 것도 알았고, 그가 The Broken Window Theory로 뉴욕의 범죄율을 많이 줄였다는 것도 알았고, 벤앤 제리 회사가 원시공동체와 유사하게 물물교환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공정과정에서 비용을 많이 줄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프랭크 로이드 라잇이 대중화시킨 미국의 건축구조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길거리를 가는데 웬 흑인이 다가와 물병을 일부러 떨어뜨리면 살짝 피해가거나 차라리 달라는 돈을 주는 것이 났다는 것도 알았고, 난생처음으로 안락사라는 것도 생각해 보게 하였다. 이것이 미국을 이해하는데 첫 단추가 되었다는 것에는 전혀 거부감이 없다. 등록금을 냈으니 주는 서비스는 일단 다 받은 것이다. 그들의 자본주의 의식이 나에게도 전수된 것일까?^^
이것을 전달하는데 애쓴 세분의 강사들은 지금까지 이름과 얼굴 다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 최고의 학부에서 최고의 ELS과정을 이수한 자들이다. 분명 그 당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여기고 가르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학원 전체 과정이 미국일괄주의하는 데는 왠지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학원의 미국 일색 수업과정이 점점 더 불편해 졌다. 이런 불편을 호소하기에는 아직 나는 눈치라는 것을 보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정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영어입력 - 한국말 출력의 메카니즘에도 걸려있어서 자신도 없었다. 어쩌면 더 심화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느 그들의 영어가 갑이고 그것을 배워야 하는 나는 을이었다. 나는 이것도 영어의 특권의식이라고 느껴졌다. 내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력한 정치적인 특권의식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나에게 스며있던 8090년대 한국대학가의 반미감정이 투사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 어학원은 동양언어나 동양에 대한 공감도 무척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같은 시기에 미국 내에는 영어 제국주의를 자체적으로 비판하는 운동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것이 Learn A Second Language Movement였다. 미국인들이 영어밖에 모르는 현실을 자각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영어가 지구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 믿고 다른 언어를 무시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지구적 리더로 자처하는 미국이 타문화에 대하여 편협하고 협소한 시각을 가졌다는 모순을 꼬집고 있다. 따라서 미국인들이여, 제발 제2외국어 좀 배워라! 시각을 넓혀라! 마음을 넓혀라! 내가 볼 때는 어학원이야 말로 동양언어에 대한 기초소양을 갖추어야 할 듯했다. (지금은 그럴 것이다. 한국의 국력이 문화력으로 확장되어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커졌으니까!)
나는 미국 중년 아저씨들의 수다 영어 앞에서 나의 협소한 특권의식을 기꺼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협소한 어학원의 힘 센 영어 앞에서는 나를 보호해야 했다. 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 발짝 더 영어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때까지 영어에 붙어있는 제국적 의미같은 것은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영어를 좋아했고, 영어가 내 학문에 필요해서 해왔다.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내가 왜 영어로 동양을 연구하러 미국까지 왔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 동양에 대한 지식과 자료는 우리가 주는 것이라서 우리가 갑인데, 영어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학계는 어학원보다 공평했다. 나는 5분 예습으로 끝낼 한문 텍스트를 미국애들은 밤새워 단어 외우면서 준비하더라. :) 정치적인 의미라는 것도 별거 아니었어!
뉴욕의 초봄! 그러다가 드디어 일이 터졌다. 어느 수업시간에 강사 한 분이 칠판에 euphemism이란 단어를 쓰면서 뜻을 물었다. 그날따라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3개월이 지났으니 이 정도는 영어로 대답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What does "ehphemism" mean?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상스러운 말이나 불편한 표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완곡한 표현법. 예를 들어 F-word!” 한국말로 한 대답이었다. 그것도 속으로 했다. 한국어로 설명하면 영어 잘한다는 소릴 들었을 것이다. 이 단어의 수준이 중간이상은 되니까. 그러나 나는 영어로 한마디도 못했다. 나는 그 단어를 아예 모르는 학생인 것이다. 어찌나 억울하던지.
나는 과연 이 단어를 알고 있던 것일까? 억울했지만 이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해지자! 영어로 철자를 쓸 줄 알고, 영어로 발음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영어로 뜻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단어로 영어문장이 술술 나오지도 않는다. 이것은 반쪽만 아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두 한국말 간섭을 허용해 왔기 때문이었다. 영어로 입력하고 한국말로 출력해 왔던 내 독해영어의 습관이 온몸에 배어있던 탓이다. 가장 독하게 남은 독이었다. 내가 영어로 수다를 떠는데 자꾸 한국말이 거리적거리면 영어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인이 한국말을 하는데 자꾸 영어가 걸리적거리면 한국말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한국말 간섭이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 된 것이다. 이것을 치워야 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분명했다. 뉴욕의 어학원에서는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첫째 이유는 그들은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잘 모른다. 그들에게는 모국어 간섭이 외국어 배울 때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라고 위로만 하고 격려하는데서 그칠 것이다. 둘째로 관심이 없다. 한국학생들에게 한국어 간섭이 얼마나 고질적인 장애물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알고 싶다고 해도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영어능력이 안된다. 셋째로, 설사 어찌어찌해서 알려 주었다고 해도 내가 일 년 있을 동안 그 해결방법을 찾아주진 못할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일 년 중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결론은 나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영어의 나라 한복판에 있는 어학원에 크게 기대지 않기로 했다. 비자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했지만 실제로는 포기했다.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운다는 각오를 했다. 영어 원어민이 지천에 깔린 뉴욕에서 혼자영어를 시작했다. 더욱더 아웃사이더로 밀려나가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섭다기보다는 자유로웠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영어로 수다를 떨고 싶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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