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면'이 된거다!
영어 귀 뚫기는 영어습득의 가장 주목받는 과정이다. 국내에서 영어귀 뚫기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이었다. 한편으로는 문법위주의 독해중심 국내영어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듣기와 말하기의 실용영어가 강조되었다. 특히 듣기가 주목을 받았다. 말을 하려면 먼저 들어야 하니까. 때마침 듣기 도구에도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도시락통만 했던 카세트테이프가 손바닥만한 워크맨으로 전환된 것이다. 청바지에 티 한 장 걸치고 워크맨을 들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뭔가를 듣고 다니던 모습은 90초 중반 가장 모던한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때 국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진 영어 귀 뚫기 방법은 듣기 드릴이었다. 말 그대로 드릴이었다. 손에 워크맨을 들고 플레이 - 스탑 - 리와인드 - 스탑 - 플레이 이 순환을 끊임없이 한다. 다른 한 손으로는 딕테이션을 한다. 언제까지? 영어 한 문장에 담긴 모든 단어가 들릴 때까지. 그것이 몇 번이든 계속 돌린다.
연대 앞에 가면 이런 리스닝드릴을 하는 소그룹 과외가 많았다. 작은 건물 이삼 층을 기어 올라가 다락방 규모의 교실에 들어가면 이런 소리밖에 안 들린다. 스르륵 - 탁 - 조용 - 스르륵 - 탁 - 조용 -스르륵 -탁 -조용! 이 광경을 보면서 생각을 해 보았다. 이 듣기 드릴을 2~3개월 하면, 토플 듣기는 잘 볼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뒤는 기계소리만 남고 영어는 사라질 것 같았다. 내 생각은 맞았다. 강산이 세네 번은 지났는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나, 열심히 딕테이션 했던 영어문장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기계소리에 밀려 버린 것이다. 듣기 드릴을 하지 않았던 것은 잘한 일이 되었다.
뉴욕 어학원을 포기하고 자구책으로 찾았던 듣기 방법은 영화보는 것이었다.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 평짜리 기숙사 방에 꼭 맞는 100불짜리 꼬마 삼성 텔레비전이 있었다. 처음 맛보는 케이블 텔레비전이었다. 그중 영화채널이 따로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고, 게다가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았다. 당연히 몰입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영화는 총알 탄 사나이 3탄이나 백 투더 휘우쳐처럼 시대 지난 옛날 영화들이다. 내용도 다 알고 대사도 별로 없어서 어렵지 않게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아직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귀라서 신선했다. 그런데 문제는 맨날 들리는 장면만 들리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켜 놓고 무심하게 있다가 문득 집중하는 장면도 들렸던 장면이다. 어쩌다 텔레비전을 켜도 꼭 들렸던 그 장면만 나왔다. 기가 막혔다. 그러다가 지겨워졌다. 아무리 들어도 발전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영화 듣기 드릴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듣기 드릴을 계속 거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의 어마어마하신 사부님들의 금쪽같은 조언 때문이었다: "들리면 말한다." 나의 사부님들은 개화기 이후 625세대 한국의 다중언어자들 Poliglots이다. 고전어와 현대어 합쳐서 평균 10개 언어를 하신다. 이분들 중에는 장익신부님도 계셨다. 장익신부님은 독해언어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영어, 블어, 독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중국어, 라틴어, 그리고 동유럽국 한두 개 정도를 모두 구사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80년대 한국 교황님 방문을 기획할 때 교황님에게 한국어 가르친 분이기도 하다. 교황사절단이 각국에서 왔을 때 독어를 블어로, 스페인어를 영어로, 중국어를 영어로 크로스 동시통역을 하셨다는 신화도 있다. 이런 분들이 "들리면 말한다" 하면, 그것은 반드시 따라야 할 진리다. '들리면' 저절로 '말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당연히 먼저 '들리면'의 상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방법은 안 가르쳐 주셨다. ^^ ^^ ^^ 따라서 '들리면'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상황인지 상상을 많이 해 보았다. 잘 따져보면, '들린다'와 '안 들린다' 사이 중간 상태란 사실 있을 수 없다. 들려야 들리는 상태이고, 안 들리면 그냥 안 들리는 것이다. 들리려다 마는 상태라든지, 반만 들렸다든지 하는 상태가 가능할까? 예를 들어 euphemism [유포미즘]이란 소리가 반만 들렸다는 것이 무슨 상태일까? [유포 --]만 들리거나 [--미즘]만 들렸다는 말일까? 그럼 이건 안 들린 거지 어떻게 반만 들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드릴을 한다는 것은 이런 애매한 상태에 대한 경험을 줄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포--], [유포--]하다가 [유포--즘], [유--미즘]-- 하다가 결국 [유포미즘]으로 들리겠지. 어쨌든 억지로 '들려지게' 만든 상태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들린다'는 상태는 절대 억지로 '들려지는' 상태는 아닐 텐데!
만약 드릴로 '들린다'의 상태를 성취했다면, 앞으로 또 다른 레벨의 영어? - 아니 다른 분야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 다른 분야의 영어를 할 때는 또 드릴로 시작을 해 줘야 하지 않을까? 드릴이 습관이 되어 계속 드릴을 해야 하는 것이다. 너무 힘들어. 말이 들리는 것이 그렇게 힘들면 안 되지 않을까? 순전히 나의 상상에 따른 분석이었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들린다'는 어디까지 '자연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 자연스러운 상태를 성취해야 하지 않을까? 드릴로 자연스러운 상태를 성취할 수 있을까? 드릴은 자연스러움과 정반대인데!
요샛말로 '그냥 듣기'를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냥 듣기가 드릴 듣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듣기 드릴은 영어의 외모에 집중한다. 발음과 철자 같은 언어의 그릇에 집중한다. 그릇에 담긴 뜻까지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외우고 있던 한국말 뜻을 연역적으로 연결시켜 대부분 해결한다. 반면, 그냥 듣기는 정반대이다. 발음과 철자 같은 언어의 외모는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 외모에 담겨 있는 감정의 뜻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나의 뉴욕 그냥 듣기가 점진적인 효과를 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본다. 맨해튼 거리를 쏘다니며 영어를 소리로 영접했던 것도, Oops란 소리가 마음에 걸려 Oops Moment 체험을 하게 된 것도 감정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서였다. 이때가 5월 말 어학원 일 학기가 끝났을 때였다. Oops moment 체험 이후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진짜 미국인을 만나서 영어를 대면하고 싶어졌다. Oops 체험 하나 믿고 벌써 뉴욕인을 만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시기상조 아닌지는 잘 몰랐다. 그러나 Oops 체험과 미국인 대면하는 것 사이 어디 즈음 중간단계에서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뭔지 딱히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마음도 좀 급해졌다. 약간의 강행군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즈음에 제프 Jeff(가명)가 나타났다. 같이 몰려다녔던 한국인 학생 중 가장 막내 수 Sue(가명)을 통해서 알게 된 미국인 친구다. 운이 정말 좋게도, 제프가 가진 모든 조건들이 나에게 정말 꼭 맞았다.
우선, 제프는 한국인 정서를 아는 친구였다. 안다기보다는 열려있다고 하는 편이 옳다. 제프는 수의 고모의 약혼자였는데 고모네가 한인 교포였다. 제프가 가끔씩 우리한테 놀러 와서 수 집안얘기를 너스레를 떨면서 했다.
"You know, the other day, I saw Soo (막내)'s mom just spanking her right in front of my eyes. Jesus! Nobody stopped mom."
"글쎄, 지난번에 수엄마가 내가 있는데도 수를 막 두들겨 패는 거야. 세상에나! 근데 아무도 안 말려." 마치 못 볼 것을 본 얼굴이다. 놀란 토끼 같은 하얀 눈동자가 검은 얼굴에 콕콕 박혀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우리는 박장대소를 하곤 했다. "엄마가 걱정이 돼서 화가 나신 거야. 수가 잘못한 거지." "I know. I know."를 하면서도 제프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시지 않는다. 수의 미래에 관한 가족회의에 참석했던 제프는 못 볼걸 보고 온 것이었다. 영어를 못해서 대학을 떨어진 것이 맞아야 할 일인가?
영어 초짜에게는 그나마 한국문화를 접해 본 원어민이 훨씬 유리하다. 일단 내가 영어에 맘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판단은 이미 미국일색의 어학원에서 낭패를 보았던 경험에 근거했다. 따는 케이 드라마, 케이 팝, 방탄소년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김치가 일본 것인 줄 알던 때였으니까. 제프 정도면 충분했다.
다음으로, 제프는 흑인이었다. 흑인은 말이 빠르다. 백인보다 두세 배는 빠르다. 흑인의 영어를 알아들으면 영어를 완성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제프는 정말 말을 빨리했다. 나도 제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다른 백인들 말은 거저 알아들을 수 있을 거란 계산을 나름 하고 있었다.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주제에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제프가 말을 빨리하는 것이 사실 맘에 들었다.
다음으로, 제프의 전공이 내 전공 옆집이었다. 제프는 신학대 교수 지망생이었다. 나를 만났을 때 제프는 콜롬비아 대학 소속 유니온 신학대학 박사과정 일 학기에 재학 중이었다. 유니온 신학대학은 진보적이고 비정통적인 신학의 학풍으로 유명하다. 내 종교학과 접점이 있었다. 종교학 쪽에서 보면, 종교신학이었다. 학부도 개혁장로교적인 프린스톤 대학 신학과를 나왔다. 직접 토론 같은 것을 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공감대가 있다는 것도 영어초짜에게는 중요했다.
제프는 집안이 좋아서 아이비리그만 다닌 것이 아니다. 정반대이다. 제프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남부 뉴저지 출신이었다. 학교는 모두 장학금으로 다녔다. 생활비가 없어서 99센트짜리 맥도널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살았던 때도 있었단다. 우리 라면 같은 거다. 그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그래서 제프는 햄버거를 안 먹었다. 대신 푸짐한 한국음식을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꺾이기엔 제프의 머리는 좋았고, 그의 인성은 강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신학대 교수가 되려는 열정을 키워 온 것이다. 제프의 목소리에는 항상 긍정의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 나는 그런 제프가 맘에 들었다. ^^ 할렐루야! 이 정도로 안심할 수 있어서 마음을 열 수 있었고 마음을 열 수 있어서 영어가 나에게로 들어올 길이 마련되었다고 본다.
제프를 만난 지도 2달 반이 다 지나가던 때였다. 그날 오후에도 Jeff는 어김없이 왔다. 참 성실한 뉴욕의 원어민 선생님이었다. 뉴욕적 '성실함'이란 한국의 그것과 좀 다른 냄새가 나긴 했다. 계약했던 서비스를 약속한 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준선 base line이다. 한국사람이 즐겨 말하는 '학생을 위한다'라는 명분은 이미 감정의 영역에 속한다. 만약 제프가 '학생을 위해서' 과외알바를 하는 것이었다면, 그 학생이란 구체적인 대상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된 상황이다. 따라서 제프의 성실함은 오히려 김연아가 말했듯이 '이유가 어딨 어요. 그냥 하는 거지요.' 같은 느낌이다. 제프는 제프의 일을 하는 것이다. 전혀 부담이 없다. 선선하다.
그날도 제프는 제프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열심히 떠드는 것이다. 다행히 제프는 말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제프가 말을 시작하면, 사람이 바뀌었다. 의자에 앉는 태도부터 달라졌다. 얼굴표정에도 다소 리더의 모습이 나타났다. 목소리톤도 다듬어졌다. 자연스러움은 유지했다. 실제로는 연출된 상태 같은데 연출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꾼은 꾼이었다. 여느 미국인들이 그렇겠지만 제프도 표현의 범위가 컸다. 목소리 톤도 오르락내리락하고, 그에 따른 몸짓도 손짓도 아주 컸다. 맞다. 마치 톡쇼 Talk Show의 호스트 같아 보였다.
그날도 그렇게 제프는 내 앞에서 톡쇼를 해 주었다. 제프의 톡쇼 주제는 하나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굽히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하면 심각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온몸을 휘저으며 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큰소리로 말하면 대부분 열받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깨를 축 떨어뜨리고 울 것 같은 슬픈 표정으로 두 손을 모으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면 슬픈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별반 움직임 없이 같은 톤으로 길게 말하는 것은 지루한 논리로 지루한 이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제프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고 있다. 대신 제프 앞에 꼼짝없이 앉아 제프가 쏟아내는 말에 담긴 감정의 색깔에만 집중만 하고 있었다. 못알아 들으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나의 반응은 제프의 목소리 톤과 표정, 손짓 그리고 몸짓에 따라서 어줍지 않게 얼굴 표정에만 비쳤을 것이다. 심각한 톤이면 어설프게 심각해졌다가, 화난 목소리면 의심 어린 눈초리로 어색하게 찡그렸다가, 슬픈 톤이면 혹시 슬펐던가 하면서 엇박의 표정을 지었을 것이고, 지루한 논조면 결국 지루해지지만 지루한 기색을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참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반응 외에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멍청하게 앉아있었다. 아이고, 에고 같은 한국말이 튀어나올만한데 그러지도 못했다. 왜냐면 언제 그래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내 감정에 영접해 둔 Oops는 할만한 상황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제프의 말 속도는 나에게는 빛의 속도였다.
원어민 쌤은 혼자 난리가 난 듯 부산하게 말하고 있고, 학생은 뻘쭘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영어과외 현장! 이런 영어과외가 있을까? 내가 해달라고 했다. 제프와 영어과외를 시작하면서 내가 제안을 했다. 가르칠거리를 찾을 필요도 없고, 가르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나에게 와서 무조건 영어로 떠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그냥 떠들어달라. 나 신경 써서 영어연출하지 말고 늘 하던 대로 영어를 해 달라. 내가 못 알아들은 것 같은 단어나 문장을 설명하려고 하지 말아 달라. 그냥 하고 싶은 말만 실컷 해 주면 된다. 이런 것을 요구했다. 버벅거리는 영어로. 사실 영어교사에게 이렇게 쉬운 수업이 어디 있을까? 아마도 이런 과외를 제안한 한국인이 없었겠지. 제프는 입꼬리가 턱에 걸린 표정으로 흔쾌히 허락을 했다. Yap! I can do that!
나는 그냥 듣기를 계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맨해튼 거리 그냥 듣기 이후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것이 제프의 톡쇼를 그냥 실시간으로 듣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말 그대로 '들릴 때까지'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들려질 때까지'였다. 듣기는 절대 자기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동이다. 피동! 누구에 의해서 들려지는 건지도 모르는 그런 희한한 상태가 '들린다'라는 상태다. 그걸 그때 깨달았다. + 그런 상태가 되는 것도 엄청난 인내를 요구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 실제로 효과가 있으리란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것도 깨달았다.
벌써 8월 말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일이 주일 뒤면 2학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아직도 내 귀는 먹통이다. 아직도 들려지지가 않는다. 절벽이다. 좀 더 강행을 했어야 했나? 이러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던 때이다.
그날도 역시 제프는 웃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제프는 웃긴 이야기하는 것을 제일 신나 했다. 꼭 하나씩은 하고 갔다. 사실 웃긴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파악하기가 쉬웠다. 혼자서 난리 법석을 치니까. 내용을 모르긴 해도 제일 잘했던 것 같다. 그날도 뭐가 그리 웃기는지 막판에 혼자서 박장대소를 했다. 그날의 제프의 톡쇼도 또 혼자 웃긴 이야기로 끝났다. 내 다급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Time's up! This is for today! Bye! See you!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방이 텅 빈 기분이었다. 한쪽 벽에는 소파와 응접실 테이블이 기대 있었다. 가구는 그것이 다였다. 더 텅 빈 듯했다. 걸레를 들고 한국식으로 방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소파와 응접실 테이블 사이를 벅벅 닦고 있었다. 뭘 했다고 피곤했는지 아무 생각이 없던 것 같았다.
긴 창문으로 뉴욕의 늦은 여름 햇살이 들어와 방바닥을 가득 메웠다. 연한 파스텔톤 하늘색 벽이 예뻐 보였다. 주위는 조용했다. 걸레 문지르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말 그대로 느닷없이, 머릿속이 갑자기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뭔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영어단어들이었다. 영어단어들이 착착 착착 줄을 서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의미 없이 낱개로 쏟아져 나오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장이었다. 단어들이 문장이 되어 차례대로 나왔다. 그 문장 위로 제프의 목소리가 더빙되어 나왔다. 어맛! 그리고 제프의 커다란 웃음이 들렸다. 나도 모르게 덩달아 따라 웃기 시작했다. 혼자 실신한 사람처럼. 걸레질하다 말고 무릎 구부리고 앉아서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들렸다. 들려진 거야! 제프가 했던 웃긴 말들이 '들려진' 순간이었다. 햇살이 가득했던 방 안의 공간이 쪼개지면서 영어가 막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영어의 OUT of BLUE가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제프가 했던 말이 이해가 다 된 것이다. 그것은 자기 친구들이 지퍼를 모르고 안 잠그고 다니다가 낭패를 당했던 코미디 같은 이야기였다. 에피소트 4가지였다.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4가지인 것은 분명했다. 이런 것이 '들려진다'는 것이었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났다. 제프가 나에게 남긴 것이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진짜 빨리 말하는 영어도 잘 알아듣는다. LA radio방송 중에 라디오 광고만 줄창하는 채널이 있다. 말이 무진장 빠르다. 숨도 안 쉰다. 광고 사이사이에 쉬지도 않는다. 그냥 한끈에 업앤 다운이 없는 랩처럼 끊임 없이 광고만 떄려준다. 그런데 그것을 놓치지 않고 따라서 들을 수 있다. 무슨 광고인지 다 알아듣는다. 듣는 도중에는 다 알아듣는다. 듣고 나서는 다 까먹지만. ^^ 이것은 제프의 공이었다. 그동안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America Got Talent나 British Got Talent에 나오는 스탠드업 코메디안의 코미디도 잘 들린다. 물론 한번 듣고는 다 이해 못 한다. 내용에 따라서 다르지만 그래도 4~5번에는 이해한다. 10번이면 충분하다. 특히 흑인 코메디안의 코미디는 90 퍼텐트 알아듣고 박장대소한다. 좋아하는 흑인 코미디언도 몇몇 생겼다. 나와 흑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가끔씩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이것도 제프의 공이었다.
내 귀가 뚫릴 때까지 아무것도 안 들렸던 상태를 재해석하자면 이렇다. 사실 안 들린 것이 아니다. 내 무의식은 접수를 하고 있었다. 특히 나는 제프가 쏟아내는 영어를 감정으로는 다 알아듣고 있었다. 이미 Oops를 통해서 영어와 감정을 연결해 놓은 상태라서 더 수월했을 수도 있다. 다만 내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 뇌세포의 신경이 새로운 정보를 입력해서 인지할 때까지 혹은 아예 새로운 영어신경세표가 생겨서 인지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고 본다. 이런 뇌정보가 없었던 그때 수동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납작 엎드려 꾸역꾸역 참고 기다렸던 내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뇌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이런 상태를 침묵기간 Silent period 이라고들 하더라. 그리고 제프가 그 침묵을 나와 함께 견디어 준 것이었다. 웃음으로! How lucky I was!
덕분에 내 영어 귀는 영원히 시끄러워졌다. 그때 뚫린 영어귀는 아직도 뚫려있다. 특히 재밌는 영어에 영원히 뚫려있게 돼서 정말 감사한다. Thanks, Jeff!
**이 글은 다시 썼다. 영어 귀 뚫은 이야기는 전에도 써 본 적이 있었다. 주로 귀가 뚫린 바로 그 순간에 대해서만 썼다. 제프를 만났을 때부터 영어체험할 때까지 전 과정을 다시 생각하면서 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글을 쓰면서 오랫동안 간과했던 지난 일들이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기억만 난 것이 아니라 재해석도 되었다. 그러다 보니 혼자 흥분을 했던 것 같다. 흥분했던 이유는 열심했던 과거에 대한 묘한 동경인 듯했다. 하지만 혼자 흥분해서 쓰는 글은 늘 길을 잃고 엉뚱한 데서 방황을 하기 마련이다. 다 쓰고 발행까지 하고 정신이 들어보니 내가 왜 그랬지? 글의 초점이 여러 개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다시 맘 잡고 썼다.**
이 글의 저작권은 콘텐츠아트 진에게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