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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람 Jan 12. 2022

프리랜서 연주자의 기막힌 휴가

쉬는 것도 일이다

 2021년 마지막 날, 8개월간 매달린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 뮤직비디오를 마감일 새벽에 딱 맞춰 제출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마감을 앞두고 잠을 거의 못 자 휴식이 간절했지만 바로 열흘 뒤 있을 공연을 생각하면 마냥 뻗어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랴부랴 링거를 한 대 맞고 기운을 차렸다. 그렇게 올해 첫 연주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바로 짐을 쌌다. 드디어... 휴가다!


 코로나 때문에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본가에 오니 올해로 일곱 살 된 강아지가 반겨준다. '고생 많았지?' 오랜만에 마주 본 아빠의 첫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집밥을 실컷 먹고 나니 잠이 쏟아진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실컷 자고 일어났는데 새벽 2시다. 지난 12월부터 시작된 불규칙한 수면 패턴 탓이다.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그동안 보고 싶었던 넷플릭스 영화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정말 당황스럽게도 한 시간짜리 '시간의 종말' 뮤직비디오를 어떻게 접근해야 시청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해가 떴는데 아빠가 스키를 들고 내려오신다.

'그래, 스키를 가기로 했었지...'

 

 겨울철 아빠와의 스키 휴가는 우리 가족의 오랜 전통이다. 준프로급의 스키 실력을 가진 아빠는 우리 삼 남매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부터 직접 스키를 가르치셨다. 사회인이 되고 각자 흩어져 사는 우리에게 스키는 아빠와의 관계를 변함없이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평소 운동을 즐기는 나 역시 아빠와 함께하는 이 시간은 더없이 즐겁고 소중하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잘 모르겠다. 마침 아빠도 퀭한 얼굴의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냥 쉬어도 괜찮다고 하신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장비를 챙겨 들고 따라나선다. 나름 휴가인데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것도 싫고 에너지를 다 쓰고 나면 푹 잘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막상 슬로프를 따라 내려가며 바람을 쐬니 기분이 좋아진다. 발왕산 케이블카에서 즐기는 평창의 너른 경치는 언제 봐도 아름답다.


  갑자기 스키복 안쪽에 잘 넣어둔 휴대폰 진동이 계속 울린다. 진동 길이를 봐서는 대략 전화 2-3통에 단체 카톡방이 하나 생성된 것 같다. 내려와서 휴대폰을 꺼내보니 예상대로다. 여느 때처럼 리허설 스케줄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못 받은 부재중 전화를 돌린다. 공연 섭외가 들어오니 갑자기 연습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몰려온다. 뼛속까지 생계형 프리랜서가 된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프리랜서라고 쉬는 날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공연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연주자라면 더욱 그렇다. 연습은 너무나 정직해서 하루만 쉬어도 악기를 잡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음악인들 사이에 '남들 놀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일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그래서 반나절을 쉬더라도 '잘 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나름 쉼의 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터득한 것이 있다면 몸보다는 머리를 쉬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기분 좋은 공기를 마시는 야외 활동이나 운동, 맛있는 음식으로 뇌를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중요한 공연이나 프로젝트를 할 때면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게 참 쉽지 않다. 좋은 루틴을 찾지 못한다면 이 길을 오래 걸을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해서 며칠 남은 이번 휴가는 '더욱 잘 쉬는 것'을 목표로 해보려고 한다. 더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달려갈 새로운 2022년을 위해, 그리고 더 건강한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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