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에서 국민군에 이르기까지
전사(Warrior, 戰士)는 전투를 하는 것이 업인 사람이다. 전사는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흔히 전사라고 하면 씨족이나 부족 사회에서 오로지 싸우는 것에만 전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원시시대 전쟁은 수렵과 함께 남성의 활동으로 여겨졌고,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당시 성장기의 소년들을 한데 모아 동료 전사로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럽 중세시대 기사 계급,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 스위스 용병도 전쟁을 업으로 했다. 그들에게는 토지나 경제적 이득이 주어졌다. 국민개병제, 즉 군인의 역할이 시민의 의무가 된 것은 프랑스 나폴레옹 시대의 산물이다. 하지만 전쟁을 공동체의 일원이 담당해야 하는 의무는 고대부터 있어 왔다.
전쟁은 인류의 역사가 기록되기 전부터 있었다. 선사 시대 유적과 유물들은 인류가 이미 기록이전부터 무기를 들고 싸웠음을 일깨워 준다. 청동기 시대의 투구와 갑옷은 당시 전문화된 군인 집단이 있었음을 말한다. 아시리아 시대(BC 2450~609) 왕은 전쟁을 위해 평민과 노예 가운데 일부를 병사로 뽑아 썼다. 기원전 8세기 무렵에는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상비군이 생겨났다.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고대국가들은 대규모 군인을 보유했다. 중국 진나라 진시황의 무덤 병마용총이 그 증거다. 스파르타는 7세에서 60세까지 노예를 제외한 모든 남성이 병역 의무를 졌다. 당시 평균 연령을 생각하면 사실상 일생 동안 병역의무를 진 셈이다. 동양에서는 백성들이 국가에 동원되는 역(役)의 일종으로 병역이 시행되었다. 진나라의 경우 징집되면 2년을 군영에서 보내야 했다. 우리나라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고대에서부터 시행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병역을 부과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 입역연령이 15세였다.
고대 로마의 로마군단은 애초에 전쟁이 있을 때 임시로 모집되는 군대였다. 이때 군에 충원된 무산자(無産者)들을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라고 불렀다. 자기 몸뚱아리 밖에 없어 아이를 낳아 용병으로 보내는 사람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 1848>에서 이 용어를 차용하여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세력으로 프롤레타리아를 내세우고 타도대상으로 지목한 자산가 계급을 '성안에 사는 사람'이란 뜻의 부르주아지(bourgeoisie, 프랑스 용어)로 명명했다. 로마는 로마제국에 이르러서 상비군 직업군인체제가 되었다. 중세시대 유럽의 군인은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되었다. 귀족은 직업군인인 기사(knight, 騎士)가 되었고 평민 출신은 보병과 궁병이 되었다. 중세 동양의 경우 관료제도를 통해 문반과 무반이 정착하면서 군을 전담하는 관료가 만들어졌다. 한국의 경우 고려 초에 문무반으로 구분되기 시작하여 양반제도라는 명목으로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군사제도는 비용이 많이 드는 상비군을 유지하기보다 필요할 때마다 징집하는 형태가 더 많았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피렌체, 베네치아 공화국 같은 도시국가들은 용병이 성행했다. 이들 용병을 이끌던 용병대장 콘도티에로(Condottiero)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런 용병은 자신의 이익을 좇아 자주 배반을 일삼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용병대장들이 자신의 위세민을 생각하는 나머지 외국 군대의 침략에 맞서기 힘들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30년 전쟁(1618~1648) 시기 전쟁 양상은 각종 화포가 주도하는 형태로 변했다. 승리를 위해서는 보다 오랫동안 고강도의 훈련을 받은 숙련된 군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기존의 미늘창을 주력으로 하던 보병 부대를 화승총을 위주로 한 총병대로 바꾸고 대포를 주요 무기로 사용하여 상비군의 위력을 보였다. 화기의 발전은 기사를 비롯한 기마병의 역할을 무력화시켰고, 이후 유럽의 각국은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상비군으로 전환했다. 상비군이 육성되면서 군대는 이전에 민간 업자에 맡겼던 보급과 수송 역시 군의 병과 안으로 편입하였고 이에 따라 군인의 병과가 더 세분화되었다.
근세 시기 상비군은 모병제였다. 동양 역시 근세 후반에 들어 상비군을 유지하였지만 훈련도감과 같은 모병제 상비군은 소수였다.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5)는 <국가론(1677)>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모든 정부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시민으로만 구성된 군대를 구성해야 한다. 막 돼 먹은 인간이나 정신병자, 불구, 그리고 노예로 생계를 이어 가는 사람들만 소집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그 외에는 누구든 조국을 위해 싸워야 하고, 누구든 무기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국가가 지정한 연례 훈련을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맹세하지 않는 한 시민이 될 수 없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 도입은 프랑스혁명(1789.7.14~1794.7.28)의 산물이다. 프랑스혁명의 평등사상은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생각과 함께 국가주의를 불러왔다. 개인에게 부과되는 징집을 국민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모두가 하나의 국가 구성원이라는 믿음과 서로 평등하다는 신념이 있어야 가능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개별징집제를 통해 징집된 아마추어 군인이 오랫동안 훈련받아온 직업군인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근대 국가는 징집된 군인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여 그들을 전쟁터로 내 보냈다.
프랑스의 대량 징집을 가능하게 한 카르노 계획은 나폴레옹의 상관이자 1793부터 1795년까지 전쟁장관을 지낸 니콜라 카르노(Lazare Nicolas Carnot)의 작품이다. 프랑스 국민 공회는 루이 16세를 처형한 후 유럽군주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1793년 8월 23일 보편적 병역의무제도를 골자로 하는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신체 건강한 모든 미혼남자 18~25세까지는 군 복무의 의무를, 같은 연령대 기혼남자는 군수공장 노동의 의무를, 26~40세까지 신체 건강한 남자에게는 유사시 전쟁에 나가야 할 의무를 부여했다. 이로써 프랑스 나폴레옹이 유럽전역을 휩쓸 수 있는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795년 프랑스의 국민군은 120만이었는데 비해 1740년 영국군은 3만 5천 명, 1745년 프로이센 군은 15만 6천 명, 17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30만 5천 명에 불과했다.
근대 징병제의 출현에 이어 총력전 개념이 등장했다. 직접 전쟁에 임하는 군인뿐만 아니라 국가의 모든 자원과 인력을 전쟁에 투입하는 총력전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파괴와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앞으로 전쟁은 국내 총력전에 더해 진영 간 제한전 양상을 띨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 민간영역의 능력이 전쟁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22년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일론 머스크는 러시아 공격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 인터넷망을 위성 서비스 스타링크를 지원해 하루 만에 소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세기는 이념적 갈등에 따른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은 모두 이념이 전쟁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에 따라 군대 역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다. 정규군뿐만 아니라 의용군, 페르티잔, 레지스탕스와 같은 여러 비정규군과 준군사조직 역시 참전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여단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다양한 집단으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대한민국 군대는 국민의 군대이다. 대한민국의 건강한 만 18세 이상 남성은 모두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다. 우리 군대는 국민의 자제로 구성되어 있다. 국토를 방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데 충성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런 군대와 국민 사이에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 이전부터 패인 깊은 골이 있다. 고려말부터 형성된 무인 경시 문화, 지도층의 상무정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부족, 무인세력의 정치개입 등 때문이다. 거기에 인간의 이기심도 작동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빨리 지원병제로 바뀌기를 바란다. 나의 아들은 군대에 보내기 싫어하지만 남의 아들은 군대에 가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와 내 가족을 지켜주길 바란다. 나의 자식은 편한 곳에서 군대생활하기를 바라고 남의 자식은 힘든 곳에서 근무하는 게 국민의 의무이니 당연하다고 느낀다. 직업군인의 경우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연금도 주고 하니 부사관이나 장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무는 NO 보상은 YES. 이런 현상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저 사실이 그렇다는 얘기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군인이 탄생되는 환경이고 기원이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먹고사는 문제와 군대가 걱정이다. 그래서 누구는 애국심으로, 누구는 경제적 보상과 명예심으로 군인을 만들고, 군대를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정작 이해관계에 부딪치면 군대가 밀리는 게 현실이다. 반면에 우리 사회는, 완고한 사람은, 스스로는 반성하지 않고 정화하려고도 하지 않는 미디어는 우리 군대와 군인을 용감하고 패배를 모르고 언제나 승리하는 거룩하고 희생적인 집단으로 언제나 우뚝 서있기를 바란다.
국민과 군대가 분열된 듯 보이는데도 우리 군대 실력은 경이롭다. 대한민국의 탄탄한 경제력이 뒷받침된 대한민국 군사력은 세계 5위에 올랐다. 소총 한 자루 만들지 못하던 우리가 K방산 명품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BTS도 예외 없이 군복무를 해야 한다. 병역문제로 도마에 오르면 연예활동, 공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인들만 예외인 듯하다.
요즘 북한 핵이 우리의 목을 죄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군인들이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북한의 평화 공세에 속아 북한 핵 프로그램에 시간과 돈을 허용한 탓이다. 정치가 군인들 선택 폭을 좁혀 놓고 이제 와서 국방을 탓해선 안된다. 현대전은 총력전 아닌가. 북한 핵능력이 고도화될수록 우리 대한민국은 더욱더 미국의 핵확장억제에 의존해야 되고 북핵의 인질로 잡혀 북미협상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 2019년 북미판문점회담 때 그랬다.
군인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의가 결집된 국가의 정책이 군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느 시대이건 국민이 군인의 기원이 아닌 적이 없다. 군인이건 국민이건 내 나라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상무정신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이 점에서 민의를 대변하는 정치인과 여론을 결집하는 미디어가 각성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들의 몸집과 영향력이 커져있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