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적인 퇴사 이후, 휴식을 핑계로 백수의 삶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엔 매일을 알차게 보낼 생각이었다. 뭐든 배워야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지, 계획표를 짜서 생활해야지. 매일 운동을 하면서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말아야지.
새로운 매일을 단단히 다짐했다.
막상 시작된 백수 생활의 하루는 너무 빨리 지나갔다. 아침도 아닌 낮 11시 넘어서 일어나 놀면서 보이는 눈치에 청소와 빨래, 설거지를 하고, 잠깐 폰을 보고,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저녁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며칠, 몇 주 지나가다 보면, 뒤늦게 정신을 차리게 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다음부턴 무언가 조급해진다. 뭐든 해야 할 거 같다. 처음의 계획했던 다른 것들은 일단 미뤄두고 내가 좋아하는 글을 써보자 결심했다.
목표가 있으면 쓰게 된다. 혹시 당장 공모전 하는 게 있나 뒤져보며, 세 달이나 남은 공모전을 발견하고, 여기에 도전해 보자. 결심하고, 그다음엔 열심히다.
매일 노트북 앞에 앉아 엉덩이가 배길 정도로 시간을 보내면서 글을 쓰지만, 눈앞에 결과물은 썩 만족스럽지 않다. 매일 쓰고 수정하고, 매일이 반복이다.
밤늦게 그나마 글이 잘 써지는 것 같아, 새벽 3시 넘어서야 이불 위로 몸을 눕는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상시간은 아침을 지나간다. 오전 11시에 넘어서 일어나기 부지기수다.
자연스럽게 올빼미족이 되어가는 것이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공모전 결과도 좋지 않았다. 처음엔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감은 사라졌다.
그런 매일을 보내는 중 하루는 세 번째 치과에서 같이 일한 H언니를 만났다. 그 언니와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나곤 했다. (평소 연락을 잘 안 하는 나에게 먼저 연락을 자주 해주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그만두곤 처음 만나는 H는 감자탕이 먹고 싶다며 자신이 자주 가는 맛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주문을 하고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H의 물음에, 나는 마냥 놀고 있는 지금 백수의 삶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땐 무언가 해놓은 것도 이뤄놓은 것도 없이 놀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H는 내 말에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백수를 무시하지 마."
그 말을 듣고 나는 벙쪄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백수가 얼마나 바쁜데,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아무것도 안 하고 멍을 때리든, 하나하나가 다 즐거움이라고. 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냐! 너도 지금을 즐겨."
그러면서 주문한 감자탕이 나오자 우리의 대화는 끊어졌다.
생각의 관점이 달라지는 말이었다. 각자의 생각은 다 다르다. 나는 백수로 지내면서 나 자신이 아무것도 이룬 거 없이 보낸 매일매일이 한심하고 자괴감이 들었는데, H는 마음껏 놀 수 있는 백수의 삶을 꿈꾸고 있다.
사실 H도 곧 백수의 삶을 시작할 예정이라 그렇게 변호를 한 것일지 모른다. 그래도 그 말이 나에겐 자그마한 위안이 되었다.
백수의 하루가 시작됐다. 이제 일어나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억지로 뭐든 하려고 이유를 찾지 않는다. 글은 쓰고 싶을 때 쓰고, 운동은 하고 싶을 때 하고, 잠자는 시간도 자유롭다.
나는 잠시나마 백수의 삶을 아무 생각 없이 즐기기로 했다. 그동안 너무 갑갑하게 지낸 거 같아 뒤늦게 여유를 찾아보기로.
어차피 현실은 우리를 다시 일하게 만들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