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스키 Feb 10. 2022

비빔밥과 동치미 국물

'카톡'

퇴근 후 울리는 메시지 알림 소리에 신경이 한껏 예민해진다. 단체 채팅방이다. 확인해보니 비빔밥 사진이었다. "오늘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맛있는 저녁 드시고 푹 쉬세요"라는 팀장의 '몹시' 친절한 내용의 메시지를 필두로 채팅방 멤버들의 영혼 없는 대답 행진이 이어진다. 카톡, 카톡, 카톡 카톡….


몇 년 전만 해도 일과 관련된 이야기는 회사 전용 인트라넷이나, 이메일로 소통했다. 가끔 개인 SNS를 알려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교환은 했으나, 차단과 숨김 기능을 영악하게 사용하며 사적인 부분은 최대한 숨겨왔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 SNS는 이제 실시간 포트폴리오나 다름없다.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면 시대에 역행할 수 없는 법. 지인 소통용으로만 사용하던 인스타그램 계정을 명함에 넣고, 회의가 끝나면 같이 일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짤막한 인사말과 함께 전자 계약서를 메신저로 주고받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파트너 회사의 단체 채팅방에 초대된다.


나는 직업도 여러 개고 활동 분야도 다양한 프리랜서다. 요즘 말로 하자면 N잡러라고 할 수 있겠다. 프로젝트에 따라 일하는 회사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인스타그램의 팔로워도 한두 명 늘고, 메신저의 단체 채팅방 수도 늘어난다. 그렇게 초대받고 나면 드라마 <도깨비>의 명대사처럼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온갖 다양한 이유로 단체 대화 속에 소환된다. 머리는 그 친절함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속마음은 그저 피로할 뿐이다. 일할 때는 일에 몰두하고 휴식할 때는 휴식에 집중하고 싶다. 동료와의 소통 또한 일의 연장선이라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긴급 상황을 제외하고는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면 좋겠다. 퇴근 후 울리는 메시지 알림 소리에 예민해지는 이유다.


동료애의 표현을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왜 이렇게 거부감을 느끼는지 그 시작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스물한 살, 유학으로 얻은 외국어와 노안, 좋게 말해 성숙한 외모 덕에 비즈니스 통역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보이는 모습과 달리 낯을 가리는 편이어서 속으로는 매우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그분들도 삼십 대 초중반 정도였는데 당시에는 어찌나 어르신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다. 부모님 속이고 클럽 갈 궁리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내 집 마련이 고민인 그들의 사적인 대화에 낄 수도, 끼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일은 좋아했기에 자연스럽게 일과 관련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을 그어 버렸다. 요컨대 사적인 소통을 일절 하지 않았다. 당연히 퇴근 후의 메시지 같은 건 오지도 않았지만, 와도 다음 날 출근해서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현재 나의 일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은 그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태도의 좋은 점은 루머에 휩쓸릴 일이 없다. 소문이 생길 씨앗조차 없으니 사소한 감정 문제로 스트레스받을 일이 극히 드문 것이다.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개똥) 철학이 하나 있는데 어떤 일을 할 때 업무가 아닌 다른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 일은 나와 맞지 않는 것이고, 그 회사는 좋은 회사가 아니라는 내용이다. 그래서 일하다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인드맵을 그린다. 스트레스가 일에서 오는 것인지 구분하기 위해서다. 일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무능함을 빨리 받아들이고, 바로 해결하기 위한 액션에 들어간다. 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대게는 사람과의 감정 문제다. 보통 사적인 대화나 자리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사적인 소통을 하지 않으면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다시 말해, 일할 때는 일만 하라는 의미다. 일을 지속하기 위한 나만의 팁이랄까.


당연히 일 외에 사적인 소통을 전혀 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점도 있게 마련이다. 개인 사정으로 업무에 지장을 주는 상황이 생겼을 때 이해를 구하기도 얻기도 어렵다. 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힘든 일은 한 번에 오는 법이다. 뿌린 만큼 거둔다고 뿌린 게 없으니 그럴 때 감싸줄 동료도 많지 않다. 이럴 때는 조금 서글프다. 


최근에 오랫동안 지켜왔던 나의 일 철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톡과 인스타그램을 공유하게 된 배경은 시대의 변화도 있지만, 사실 더는 혼자 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만 하고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기 힘들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달까. 영화 <레옹> 속 프리랜서 킬러가 꼬마 숙녀 마틸다라는 동료를 만나 진정한 행복을 찾았듯, 이제는 나도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고충을 나누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노력한다'.  물론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지는 않는 법, 비빔밥같이 함께 섞이지는 못해도 옆에 놓인 시원한 동치미 국물처럼 잘 어울리는 정도까지면 만족한다. 나는 그런 프리랜서가, 워크 파트너가 되고 싶다.


'카톡' 


미간에 잔뜩 주름이 생긴다. 핸드폰을 집어 들어 현실 표정과는 정반대의 발랄한 이모티콘을 하나 골랐다. 나갔던 영혼을 강제로 끌고 와 답변 메시지를 작성한다. 


“와 정말 맛있겠네요~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웃음).”

이전 05화 온 앤 오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