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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로빈 Feb 22. 2021

졸업

서른 전 가까스로 졸업에 성공한 후기


제1막 :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영화 <졸업>의 결말은 영화사에 길이 남는 장면 중 하나다. 세간의 반대를 무릅쓰고 극적으로 주인공 두 사람 만의 세상으로 향하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는다. 그리고 마치 해피엔딩처럼 연출되는 이 장면의 아주 끝자락에서는 두 사람이 나지막이 제4의 벽인 관객 쪽을 보며 웃음을 잃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의 선택으로 내린 결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한 불행이기도 하다. 한 세계와의 단절은 또 다른 세계와의 연결을 의미하고, 행복을 추구해서 내린 선택은 곧 또다시 다른 후회와 역경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때문에 해피엔딩은 어떤 의미에서는 배드 오프닝이기도 하다. 방금 막을 내린 공연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극에서 주인공이었던 한 개인은 다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공연의 막이 오르는 동안에 전혀 무방비인 상태로, 리허설도 한번 해보지 못한 채로 무대에 올라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9년 만에 졸업할 수 있게 된 나는 오늘 내가 느끼게 될 감정에 대해서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바로, '별 거 없음'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건만. 나는 학생 타이틀에 머무르는 것을 사랑했다. 그것을 정확하게 즐길 줄 알았고, 그 안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법도 섭렵하고 있었다. 성장하는 척 성장하지 않는 곳.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그 쾌감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수십 병의 소주와 맥주, 수십 건의 '감성 페북'글, 수백 번의 노래방과 회식, 수십 번의 패악질과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사랑과 우정... 대학생활에 못난 글씨로 쓰인 모든 텍스트의 모든 부분을 나는 사랑했고 또 좋아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그것들과 영영 작별하는 날인 졸업은, 사실상 나에게는 '자 지금부터 성장하면 돼!'하고 누군가 나를 문밖으로 내쫓고 셔터를 내려 닫는 듯한 느낌이었다. 별거 없음보다도 더 한 감정이었다. 나는 오늘 뭔가 잃어버리는 기분으로 졸업했다.


제2막 : 나를 위한 현수막은 없었다

  코로나 시국에도 아득바득 주말을 할애해 문과대 주변 곳곳에 현수막을 걸어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디자인도 있었지만, 속으로 '오호라' 하게 되는 디자인들도 깨나 있었다. 저런 디자인을 구상하느라 들인 정성에 졸업하는 당사자는 꼭 감사해야 할 텐데, 하는 주제넘은 오지랖까지 부리게 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내 것은 없었다. 내가 9년 간 자비를 들여 찾아간 졸업식이 9번이 넘고 그 졸업식에 해준 현수막만 9개가 넘는데, 그 현수막과 졸업식의 당사자였던 사람들은 오늘 그 누구도 나를 위한 현수막과 게스트가 되어주지 않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란 얼마나 구실 좋은 변명인지.


   길이 덜 들어 발을 그야말로 토막 낼 듯이 조여 오는 닥터마틴 모노블랙을 신고서 문과대와 새천년관을 왕복 두 번을 돌며 내 사진이 들어간 현수막을 찾는 나의 졸렬함을 보면서, 나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헌신했던 것이 얼마나 보상심리에 기인하고 있었는 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그렇지만, 애초에 누군가에게 되돌려 받을 작정으로 선의를 베풀었던 것이 아니니 지금 떠오르는 얼굴들에게 섭섭함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지.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니까. 오히려 진심이 아닌데 억지로 만든 현수막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기뻐하는 것보다 진심 어린 축하만 받으며 졸업하는 것이 나에게도 더 이득이야.'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의 뒤에는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현수막이 갖고 싶었구나'라고 스스로를 비웃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제3막 : 아빠

   오늘 졸업식에는 우리 아빠도 출연했다. 그리고 오늘 아빠의 대사 중에는 '건대 캠퍼스가 이렇게 넓었구나'도 있었다. '몰랐어?'라고 내가 대사를 치면, 아빠는 '캠퍼스 안에 들어온 건 처음이니까'라고 대답한다. 그다음 장면의 나는 대사가 없다. 대신 내가 속으로 느꼈던 이야기를 조금 적어볼까 한다. 나는 9년 동안 5회 이상의 공연에 올랐다. 연극과 음악 공연. 그리고 그 공연 중 8할은 전부 건대 캠퍼스 안에서 진행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공연에 아빠를 초대했다. 그리고 아빠는 오늘 나에게 '건대 캠퍼스가 이렇게 넓었구나'라는 대사를 친 것이었다. 그가 그 대사를 통해서 느낀 것이 결코 건대 캠퍼스의 물리적 공간감뿐만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 공간감보다 더 멀어진 것이 있음을 꼭, 꼭 깨닫기를 속으로 간절하게 바랐다.

   

    아빠는 후문의 개미집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별안간 식당 안의 사람들의 이목을 끌 정도로 큰 목소리로 "야아, 로빈아. 아빠 얘기 잘 들어라. 너도 이제 졸업을 했으니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라. 네가 하는 선택에 뒤돌아보지 말고, 네가 하고 싶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면 뛰어들어라. 그리고 네가 책임지면 된다. 언제 네가 아빠 뜻대로 산 적 있냐? 네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면서 살면 되는 거야. 대신 후회도 네가 경험하고."라는 대사를 한다. 어찌나 메서드인지 주변 테이블은 아빠의 딕션과 플로우에 집중하느라 끓는 전골에 젓가락질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애석하게도 그 장면에서는 나는 대사가 없었다. 다만 '내가 아빠와 살던 때에, 당신의 뜻대로 살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라는 생각을 속으로 할 뿐이었다. 역시 인간은 서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구나, 하고 얼렁뚱땅 아빠의 대사를 서둘러 지나쳐버렸다.



제4막 : 졸업의 어떤 부분을 축하한다는 거죠

    필사적으로 찍은 사진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투실투실 부은 얼굴에 심술이 가득한 턱살, 가는 세월을 억지로 막아보고자 에스티로더 토니 컬러로 덧입은 지점토 인형 같은 얼굴, 바람에 풀려버린 고데기, 안 맞는 학사모,... 총체적 난국 속에서 건져 올린 9장의 사진은 고스란히 내 삶의 가장 중요한 호크룩스인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갔고 그곳에는 못나빠진 내 몰골조차 사랑한다고 외치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좋아요와 댓글이 함께했다. 졸업 축하해요, 졸업 축하해요... 열렬한 축하 속에서 나는 벅찬 감사함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이들은 나의 졸업의 어떤 면을 축하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품었다. 이들의 인사말이 거짓말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들이 축하하는 텍스트의 구체적인 결을 내가 파악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는 뜻이다.

    

     결혼식 복장은 전부 검정과 흰색이다. 상징과 이미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혼식은 상징적인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때가 타지 않은 시절과 작별하고, 새로운 사람과의 결속적인 관계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새로운 시작이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의 자신이 죽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졸업식의 복장도 블랙 앤 화이트인 경우가 많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든 대학생들이 상징적인 죽음을 자처하고 기꺼이 그 죽음을 기쁘게 맞이한다. (나 빼고.) 죽음 상징에 집착하는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나의 새로워진 탄생을 축하해주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학생으로서의 내 모습이 그래도 나쁘지 않았으니, 학생 다음 단계인 어른으로서의 내 모습은 더 괜찮을 것이라고 믿어주고 또 응원해주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들의 응원이 졸업 직전에 받은, 나쁘지 않은 학점의 성적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들의 응원이 텍스트가 되어 댓글에 달리기까지는, 나와 함께했던 모종의 기억들이 그 댓글에 대한 근거로서 작용했으리란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적어도 나에게 축하 댓글을 달아준 사람들이랑은 좋은 경험과 기억을 많이 나눈 것이 틀림없었다. 학생으로서의 나는 죽지만 그 텍스트는 다른 사람들의 파편이 되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5막 : 그리고 현실로

     학생으로서의 나는 이제 끝났다. 내 인생에서 하나의 학문을 이토록 오랫동안 공들여 배우는 시간은 앞으로 평생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내일 출근한다. 세상은 늘 이런 식이다. 여운에 젖어들 시간도, 그것을 수습할 시간도 전혀 없는 채로 늘 다음날이 내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억지로 몸을 흔들어 깨운다. '학생이 아니게 된 나는 도대체 뭐지? 나는 다음에 어디로 가게 되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일을 얼마나 잘 해내고 있는 거지?' 대답할 시간도 없이 나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하면서 나의 시선을 빼앗긴다. 내가 시선을 빼앗긴 나 자신의 내면이 마치 내가 내일 당장 해야 하는 일의 시선을 뺏는 일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면서.. 오늘은 월요일이었고 놀랍게도 조금 더 바빴던 것을 제외하면 다른 월요일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더 이상 건국대학교라는 곳과 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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