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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Sep 23. 2023

머리 올리는 날

필드를 처음 나간 건 레슨을 시작한 지 2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구3년 차인 동생에게 매일같이 연습상황을 보고했고 언제 머리 올려 거냐며 귀찮게 했다. 그때는 동생이 골프를 엄청 잘 친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궁금해서 물어보니 백돌이 탈출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형이 그땐 골린이였으니까 백돌이도 잘하는 것처럼 보였겠지. 그때 우리 세 명 다 백돌이 탈출한 지 얼마 안 됐어 하하하.." 같이 갔던 동생들도 고만고만한 백돌이였다니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7번 아이언 120m, 드라이버 200m 정도는 똑바로 보낼 줄 알아야~" 동생이 생각하는 머리 올리는 기준은 너무나 높았는데 이 악물고 두 달 열나게 연습했더니 동생이 제시한 기준에 거의 들어오게 되었고 드디어 날이 잡혔다.


'골프백이랑 클럽에 네임텍 달고, 신발은 꼭 스파이크 달린 걸로 사고 어쩌고 저쩌고...' 요구 사항이 참 많기도 했다. 공치로 가는데 뭐가 그리 복잡한 건지... 게다가 동생이 말하는 필드에서 지켜야 하는 에티켓 골프룰은 뭐가 그리도 많은지... 처럼 머리 올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골프 관련 자료 있을까 해서 도서관에 갔다. 의외로 자료가 없었는데 클럽하우스 들어갈 때부터  라운드를 마칠 때까지 골프 입문자에게 도움 되는 책을 찾아 읽고 머리 올리러 갔다. 


골프를 시작하고 기억나는 날을 하나 꼽으라면 머리 렸던 날이 가장 먼저 떠 오른다. 집이 경남  양산인데 머리 올리러 동생이 사는 대구까지 갔다. 마른 놈이 우물판다고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이다. 힘든 과정 참아내고 배운 골프가 필드에서 얼마나 잘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스크린에서 가상현실이 실제로는 어떻게 되는지 너무 궁금했다. 내 인생 처음 필드에서 공치는 날 어느 날보다 기다려지고 설레서 밤잠을  설치는 사람까지 있다 하니 얼마나 좋으면...ㅎ

지금도 필드 나가기 전 날에는 항상 설렌다.^^ 보스턴백 챙기 소풍가방 챙기듯 기분 좋 일이다. 골프는 반드시 필요한 소품이 몇 가지 있다. 골프옷, 모자, 신발, 장갑부터 골프공, 롱티 숏티, 볼마커등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소품들이다. 구력이 좀 쌓이면 더 이쁘고, 더 좋은 것을 선호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가성비 좋은 걸로 준비해도 괜찮다.

요즘은 공에 라인을 긋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하더라도 라운드 전날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서 내 곁에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볼라인을 그리며 설레었던 시간도 있다.


대구 근처 청통 cc에서 머리를 올렸다. 골프장 근처 국도에서 동생을 만나 클럽하우스에 같이 들어갔다. 머리 올리는 날은 평소 편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다. 이왕이면 캐디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 실력이면 최상급이겠지만 동반자를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누가 머리 올리자 하면 고민하지 말고 오케이 하는 것이 좋다.


필드에서 골프를 치는 재미도 있지만 푸른 잔디가 쫙 펼쳐진 페어웨이 앞에 섰을 때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첫 홀부터 시작되는 긴장은 끝날 때까지 풀리지 않았고 공은 원하지 않는 곳으로만 갔다. 로스트볼을 최대한 많이 준비해 가는 것이 좋은데 동생이 필드에서 직접 주운 공이라며 검정 비닐봉지에 한가득 있었다. 끝날 때 보니 반봉지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라운드 몇 번만에 몽땅 써버렸다.


홀이 거듭될수록 스크린에서 그렇게 잘 맞았 공, 레슨프로가 극찬하던 자세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뒤땅, 탑볼에다 삽질까지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상황극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동생들은 이런 내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만 원짜리가 오가는 내기를 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그날 캐디랑 둘이 공친 것 같다. ㅎㅎ 


대자연속에서 캐디랑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벌써 막홀이었, 골프는 언제나 아쉽고 4시간 넘는 시간이 금 지나간다. 이처럼 시간이 야속할 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마지막 홀 퍼팅을 마무리하고 인사를 건넬 때 잘 치든 못 치든 모든 사람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나는 그게 골프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갑 벗을 때 다음 라운드가 벌써 기다려진다면 당신은 이미 골프에 반쯤 넘어 것이다. 간혹 골프 재미없더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때 머리는 올렸는지 묻는다. 십중팔구는 스크린만 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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