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사부, 모든 것은 유희일뿐이었다
대다수의 무협에서 늘 마도(魔道) 세력이나 대다수 악역은 사람을 경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특히나 유진성 유니버스에서 강조되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가'이다. 그런 면에서 <권왕환생>의 군자사부는 악의의 군집을 보는 듯한 이질감과 공포감을 준다. (마도군자라고 쓸까 했는데 '군자사부'라는 이름이 뭔가 잘 붙는다)
<권왕환생>의 메인 빌런인 군자사부는 이미 젊은 나이에 천하제일의 경지에 오른 완성된 무인이다. 이후 그는 무료함을 느끼며, 무림맹과 흑도 등 강호 곳곳을 거쳐 살아간다. 어느 순간 세상사를 잊은 듯 '만마서옥'이라 이름 붙인 서고에 은둔한 그는 도검불침에 이른 검마, '마도'로서 성장할 제자들을 양성함과 동시에 유정홍 등의 협객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가, 아주 평범한 무인에게 부조리를 선사하여 영웅으로 만들 수 있는가 등을 실험한다. 광신은 그에게 사부라 부르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군자 사부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오랜 유희일뿐이었다. 군자 사부는 광신을 제자로 두던 시절 나눴던 사소한 대화조차 기억하지 않는다. 정작 광신은 잊지 않기 위해 늘 곱씹던 것을 말이다. 그에게는 광신도, 유정홍도, 만마궁의 제자들도 길가의 개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기에 그렇다.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을 저술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자연과의 합일 상태에서 분리되면서부터 '분리감'에서 기인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말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 - 사물과 사람들 - 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반응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게다가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 (중략)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이것이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자연과 합일에서 벗어난 인간은 이를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술과 약물에 대한 1차원적인 집착이 그러하고, 사랑 없는 성교, 난교 따위의 성애적 집착이 그렇다. 축제나 제의 등의 관습적 도취도, 넓게는 집단의 신념에 예속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유정홍은 부조리한 강호의 세태와, 분리감을 통해 겪는 원초적 불안 속에서 협객으로서 싸워나가길 결정했고 광신은 개인의 불행과 무기력감을 통해 미친 자들의 신이 되었다. 그렇다면 군자 사부는 무엇을 택했나. 프롬에 따르면, 후술 할 가히 사디즘적 방식이다.
프롬은 이런 종류의 분리감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정한 사랑'이라 말한다.
인간은 자연과 합일이 되고 싶어 하는 만큼, 다른 인간과도 합일이 되고자 하는 특성을 가진다.
“정홍아, 너도 내가 그토록 노심초사하면서 죽지 않도록 보호했건만 그저 맹주와 협객에서 그치는구나. 너를 노리던 자들을 내가 몇 명이나 죽였을 것 같으냐. 나는 네가 영웅이 될 줄 알았다. 젊었을 때 모습 그대로에서 그저 머리만 하얗게 변했구나. 네 그릇이 본래 그러한데 어찌 너를 탓하겠느냐. 열심히 사는 모습이 그저 기특하고 애틋할 뿐이었다.” 권왕환생 163화 유진성 출처: 네이버시리즈
“실로 뛰어난 우리 제자께서도 영웅이 되라고 보살폈더니 늘 주화입마에 빠져서 생사를 오락가락했었지. 나이 많은 사부가 언제까지 네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살아야 했겠느냐. 네게 실망했었다. 그래도 버텨내는 모습은 실로 인상적이더구나. 하지만 너는 개인사에 얽매여 스스로를 감당하는 것도 벅차 보였으니 영웅이 되기는커녕 미친 자들의 신이라 불리는 것이 네 한계였다.” 권왕환생 163화 유진성 출처: 네이버시리즈
군자 사부는 최종장까지 누구에게도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동일 작가의 타 작품, <광마회귀>의 마교주 역시도 보였던 특성으로, 인격적 완성이 아닌 상대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기에 실망하거나 경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사부는 광신을 '어린 제자'라 칭하며 따뜻하게 말을 건네며, 유정홍을 더러 영웅이 되지 못하고 협객에서 그쳤다며 조용히 타이른다. 제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스승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과연 온전한가.
참된 사랑의 요소는 첫째로 사랑하는 자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다. 두 번째 요소는 '책임'으로 다른 인간의 잘잘못을 함께 책임지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바로 '존경'이다. 존경이라는 것은 단순한 경외의 뜻뿐 아니라 어떤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통찰하고, 이를 수용하며 존중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 취급하는 것이 아닌 '존재'를 인정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수용) 것,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타인을 존중하는' 진정한 사랑은 본인 스스로가 '독립적인 인간'일 때 가능하다. 즉 남의 지배를 받는 (마조히즘), 혹은 남을 착취하고 지배하는(사디즘)적 요소에 의존하지 않는 내 삶에 만족이 가능한 사람이다. 군자사부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는 무(武)로서는 신에 준하는 경지에 이르고서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한다.
만마궁의 제자들 역시 그에게는 제자가 아닌 실험체였다. 광신과 유정홍 등의 백도 인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군자 사부는 명목 상 동등한 위치인 대사부들조차 친애하지 못한다.
그는 그저 진소한과 백무진의 시대를 동경하며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자신을 가끔 한탄하며, 이 시대에서 이룰 일이 없다는 목적의 부재로서의 부조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도-마조히즘적 태도) 사람을 실험체로서, 유희거리로서 대한다.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을 때, 타인에게 예속되거나 타인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통해 '미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공허감과 불만을 표출하고자 한다.
“나는 영웅을 찾아서 한참을 헤매었지. 내 적수들은 오래전에 다 죽었기 때문일세. 나는 이 세상에 잘못 태어난 것 같더군. 읽으면 깨닫고, 익히면 터득했네. 그러나 하늘은 내게 이런 능력을 주긴 했으나 벌레 같은 자들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은 주질 않았다네.” 권왕환생 163화 유진성 출처: 네이버시리즈
과연 측은지심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을 '받지 않은 것'일까.
군자 사부는 그런 의미에서 사디즘적 행보를 보인다. 그가 몸담은 많은 곳은 멸문되었으며, 혈신궁과 비천을 포함한 많은 곳을 종속시키고 지배하며 그들의 삶의 목적에 깊게 간섭한다. 제자라는 이름의 '노예'를 키우며 그들의 우정과 서사를 시험한다.
사디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오직 '힘'을 찬양한다. 그는 힘을 가진 사람을 숭배하고 예찬하며 (무신 상태의 단우성, 진소한과 백무진 등 전기의 영웅들) 약한 사람들을 경멸한다. 프롬이 말한 이들의 결정적 특징은 무력한 자들에 의해서만 자극을 받고 대등한 상대에 대해서는 자극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상처를 입히더라도 상대를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무공 대결이란 말이냐. 놓아라.” 권왕환생 176화 유진성 출처: 네이버시리즈
군자가 축 늘어진 채로 물었다. “권왕, 내가 왜 진 것이냐.”
단우성이 대꾸했다. “네가 세상일을 어찌 다 알겠느냐. 궁금해도 모른 채로 죽어라.”
“알려다오. 이유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군자가 무서운 눈빛으로 단우성을 노려보더니 재차 질문을 던졌다. “도저히 내가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유를 알려다오. 무언가 있는 것 같다.”
권왕환생 177화 유진성 출처: 네이버시리즈
군자 사부는 한평생 무신들을 동경하고 그들과의 일전을 바랐음에도, 무신이 된 단우성과의 마지막 혈투를 즐기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물론 이는 물질적인, 물리적인, 혹은 권력이건 명분이건 지극히 세속적이고 형이하학적인 범주에서 말이다.
프롬은 '권력'이라는 말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설명한다.
첫 번째는 형이하학적인 것이다. 전술한 물질적, 물리적, 무협의 세계라면 '무공'의 문제다. 강호에서는 힘의 논리로 상대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권력이다. 두 번째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어제, 오늘은 산적으로 살았지만, 앞날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약자를 괴롭히기 전에 세상을 조금만 더 살펴봐라.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고,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다. 배우면 돼.” (중략)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신 후에 차분한 어조로 읊조렸다. “대장부로 태어났는데 산적이 웬 말이냐.”
광마회귀 [독점] 141화 유진성 출처: 네이버시리즈
첫 번째 부류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결국 어떤 방법으로도 자연과의 분리감과 무기력감을 탈피하지 못하는 본인에 대한 불만과 불안에서 기인한다. 즉 진정한 힘을 결여한 나약한 인간이 남을 착취함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발악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강한 것, 행복한 것은 어떤 것일까?
프롬은 인간이 자신의 '이성적 잠재능력'을 전개했을 때 행복감을 찾을 수 있다 역설한다.
어느 상황에서도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고,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해 끝없이 되묻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마교를 뛰쳐나간 검마처럼,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지키고자 뒤늦게 강호에 출도 했던 전생 광마처럼, 대장부로 태어나 자신의 삶을 오롯이 결정한 장산처럼 말이다.
또한 그러한 삶은 결국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도 구원할 수 있다. 내 옆의 사람 역시도 부조리한 세태의 파도 속을 함께 살아가는 동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존경한다.
편리한 악의(惡意)가 만연한 공간 속에서, 어떤 것이 나인지 끊임없이 되묻고 결국엔 '그것은 내가 아니다'를 외치며 뛰쳐나온 그 모든 시도를 존중한다. 삶의 길을 스스로 찾고자 애쓰고 그 길을 정진하고 있는 모두를 응원한다.
우린 무공도 마법도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지만, 일상을 살고 매일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프롬이 말한 행복이고, 카뮈가 말한 저항이다. 함께 부조리한 세태에 저항하고 있는 옆사람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주는 것,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 역시 당신을 존재로서 응원함을 전달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사랑이다.
군자 사부보다 강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주 평범한 하루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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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엔 너는 가족을 만들 용기가 없는 놈이다. 아내를 맞이하고, 그 아내와 아이를 낳을 용기가 없을 것이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아이가 혹시라도 불상사를 당하면 네 가슴이 찢어질 테니까. 애초에 가족이 없었던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저 남의 가족이나 죽여대면서 저 스스로 겁이 없는 남자라고 으스댈 뿐이지. 그것이 네 본질인 것이다. 광마야, 홍수야. 그것이 너란 말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너보다 약한데도 너보다 훨씬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너는 모르는구나.”
권왕환생 158화 유진성 출처: 네이버시리즈